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고구려 건국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에 건국함.

고조선 멸망 후 여러 ‘나’ 집단이 통합되어 5부 체제가 성립되었고,
주몽이 계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해 고구려를 건국하였음.
이후 태조대왕 대 국가 체제를 확립함.

고구려 건국

■ 이전
 - 압록강 중류 지역에는 하천과 골짜기를 따라 ‘나’라 불리는 지역 집단들이 형성되어 있었음.

 ▶ BCE 108 고조선이 멸망한 뒤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 BCE 75 이 지역 집단들은 현도군을 축출하며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났음. 
 ▶ 이후 ‘나’들은 부여계 이주 세력의 영향을 받으며 정치적 통합과 재편 과정을 거쳤고, 결국 고구려의 5부 체제로 정비되며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됨.
 ↘ 고구려 5부 중 계루부는 다른 부와 달리 명칭이 ‘○노부’ 형식이 아니어서 기원과 혈통이 다를 가능성이 있음.

 - BCE 57 박혁거세가 경주 지역에서 사로국(신라)을 건국함.

■ 고구려 건국
 ▶ 기원전 37년 계루부 출신의 주몽이 네 부족을 통합하여 졸본천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 계루부가 중심 세력으로 성장해 왕을 배출하고 외교·전쟁 등 대외 권한을 독점하게 됨.
 ▶ 이어 비류국 등을 정복하며 국가의 기반을 다졌음.
 ↘ 산악지대에 위치해 농사에 불리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음.
 ▶ BCE 19 부여에 남겨두었던 주몽의 부인과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음.
 ▶ BCE 19 같은 해 주몽이 세상을 떠났고, 이후 동명성왕이라 불리게 됨.

 - BCE 18 온조가 한강 남쪽 지역에서 백제를 건국함.

□ 건국 설화
 ▶ 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강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정을 통했고, 이 일로 유화는 쫓겨나 부여의 금와왕에게 보호를 받았음.
 ▶ 얼마 후 유화는 알을 나았는데, 그 알에서 나온 주몽은 활 솜씨가 뛰어나고 재능도 많았음.
 ▶ 하지만 부여의 왕자들이 주몽을 시기하자, 그는 남쪽으로 떠나 고구려를 세움.
 ↘ 고구려의 건국 설화는 부여의 동명 설화를 차용한 것으로, 이를 통해 고구려 건국에 부여계 집단이 참여했으며 계루부의 독특한 명칭은 그들의 이질적 기원을 보여주는 단서로 해석됨.

 - 환인의 망강루 고분군에서는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에서 부여계 장신구가 출토되어, 부여계 집단과 고구려 토착 세력 간에 문화적 교류와 융합이 있었음을 보여줌.

□ 사회 제도와 풍습
 - 고구려에는 귀족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제가 회의가 있었고, 
 - 혼인 풍습으로는 신랑이 일정 기간 신부의 집에서 생활하는 서옥제가 있었음.
 - 또한, 10월에는 제천행사인 ‘동맹’이 열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짐.

■ 이후
 ▶ CE 3 2. 유리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겨 국가의 기반을 다졌으며,
 ▶ 이후 즉위한 6. 태조대왕은 독립적인 정치 집단 세력들에 대한 편제를 사실상 마무리함.




# 참고 자료
중학교 역사2, 금성출판사 2023
중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고구려 건국]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