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YH무역
 ▶ 1965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뉴욕무역관 부관장이던 장용호는 가발
            생산업체 YH무역을 설립했고,
 ▶ 1970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음.
 ▶ 하지만, 뉴욕지사의 외화
            도피와 본사 사장의 자금 유용 등 방만한 경영으로 재무 구조가 크게
            악화하였고,
 ▶ 1979.1
            은행이 회사와의 거래를 중지하며 공장 압류를 예고했음.
□ 폐업 공고
 ▶ 1979.3 YH무역은 경영 부실을 이유로 폐업을 공고함. 
 - 이는 사실상 위장 폐업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치였음.
 ▶ 이에 YH 노조는 공장
            운영과 기업 재건에 협조하며 폐업 철회를 위해 정부 부처와 관계기관에
            진정을 이어갔으나,
 ↘ YH 노동자들은 섬유노조와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지원을 받아 1975년에 노조를 결성
 - 회사는 고용승계 약속을 뒤집고 루머 유포와
            일감 중단으로 조합원 이탈을 유도했음.
 ▶ 1979.8
            YH 노조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회사는 재차 폐업을 공고하고, 기숙사
            단전·단수 및 폐쇄, 퇴직금 공탁 통보 등으로 노동자들을 압박하자
 ▶ 노조는
            종교·인권단체와 정치권에 도움을 요청하며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했음.
          
            ■ YH무역 사건
□ 정치적 이슈로 부각
 ▶ 8.9 새벽 YH 노조
            여성노동자 187명은 신민당사로 이동해 김영삼 총재의 지지 속에
            본격적인 농성에 돌입함.
 ▶ 농성이 정치적 이슈로
            주목받자 신문 보도가 잇따랐고, 신민당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며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소집을 요청해 정부를 비판했으나,
 ▶ 여당의
            반대로 보건사회위원회 소집은 무산되고, 정부는 경찰력을 집중시켜 강제
            해산을 압박했음.
□ 정부의 강경 진압
 ▶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은 ‘101호 작전’을 펼쳐 신민당사에 강제로 진입해 YH 노조
              조합원은 물론 정치인과 기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30분 만에
              농성을 진압했음. 
 ▶ 이후 노동자들은 분산 수용되어 조사를 받고
            최소한의 퇴직금을 받은 뒤 강제로 귀향 조치되었으며,
 -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숨진 22세 김경숙 상무집행위원에 대해 경찰은 자해라고
            주장했음.
 ↘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고 김경숙에게 자해
              흔적은 없으며, 외력에 의한 치명적인 상처가 있었음을 발표
          
            ■ 이후
 ▶ 정부는
            노동자와 이를 지지한 종교·문학계 인사들을 구속하고 YH 여성노동자들의
            재취업을 제한했음.
 ▶ 1979.10 정부의 강경 진압을 비판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국회에서
              제명되어 의원직을 상실했고, 
 ▶ 이에 반발한 시민과 학생들의
              부산·마산 시위는
              박정희 정권 붕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