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장보고


신라 말 해적이 극심해지자, 당에서 활동하던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함.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당·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장악하며 국제 무역을 주도했음.
그러나 이후 중앙 정치에 개입하며 중앙 귀족과 갈등을 빚게 됨.

장보고

■ 당으로 건너감
 ▶ 장보고는 바닷가(청해 주변으로 추정)에 살던 평민 출신으로 보이며,
 ▶ 당나라 서주(지금의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에 올랐음.
 ↘ 무령군은 서주절도사 휘하의 지방 군단

□ 당 분열기 속 장보고의 성장
 - 당은 안사의 난(755~763) 이후 분열기에 접어들었고, 장보고는 이 과정에서 지방 세력의 군사·통치 방식을 체득하며 바닷길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했을 것으로 보임.
 - 또한,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산둥반도(지금의 산둥성 동쪽 지역) 등 당 동부 해안에 거주하던 신라인 사회와 교류했으며,
 - 823 산둥반도 적산에 법화원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후원해 신라인을 포함한 현지 사회의 중심 거점으로 성장시켰음.

□ 신라의 혼란과 해적의 등장
 - 신라는 혜공왕 이후(763 >) 귀족 반란이 잇따르며 정치적 혼란이 심화했고, 이에 따라 지방 통제력과 군사력이 크게 약화했음.
 ▶ 9C 초 그 결과 해안에서는 해적이 당과의 무역선과 조운을 약탈하고 주민을 노비로 매매할 정도로 피해가 확산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음. 

■ 신라로 돌아옴
□ 청해진 건설
 ▶ 828년 4월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을 위해 청해(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군진 설치를 건의했으며,
 ▶ 당에서의 전투 경험과 재당 신라인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흥덕왕에게 인정받아 청해진 대사로 임명됨. 
 ↘ ‘대사’라는 직함은 신라의 정식 관직은 아니었지만, 왕으로부터 해적 소탕이라는 특별 임무와 그에 따른 독자적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임을 의미
 - 청해진은 국가 공인 군진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장보고 개인의 사적 해상 세력 기반이기도 했음.

□ 청해(완도)의 해상 교통·군사적 중요성
 - 완도는 주변 해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임.
 - 통일신라 시기 신라와 당을 오가는 항로는 황해 중부 항로(당성진 ↔ 옹진반도 ↔ 산둥반도)와 황해 남부 항로(영산강 하구 ↔ 양쯔강 하구)로 나뉘었으며, 이 중 황해 남부 항로는 청해진의 활동 범위에 포함되었음.
 - 더 나아가 완도는 일본 규슈와도 해상으로 쉽게 연결되는 위치에 있어, 신라-당–일본을 잇는 국제 해상 교통의 길목이자 군사적·상업적 요충지로 기능했음.

□ 해상권 장악과 국제 무역 활동
 ▶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해 해상 교통로를 안정시켰으며, 그 결과 신라인 납치·매매가 사라질 정도로 서남해 일대의 치안이 크게 개선되었음. 

 ▶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을 중심으로 무역망을 조직하여 적산포(산둥반도), 초주·연수현(양쯔강·회하 유역), 양저우(장쑤성) 등을 청해진과 연결하며 신라의 대당 무역을 주도했음.
 - 또한 항해력과 외교적 제약으로 당과의 직접 교역이 어려웠던 일본을 상대로, 다자이후(규슈 후쿠오카현)와 하카타(규슈 후쿠오카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대일 무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음.
 -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장보고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삶의 기반을 잃은 백성들을 규합·보호하는 사회적 역할까지 수행함.

□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
 ▶ 836 제42대 흥덕왕이 세상을 떠나고 후계자가 없는 가운데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고, 희강왕이 즉위함.
 ▶ 838 제43대 희강왕은 제44대 민애왕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의탁해 민애왕 제거를 요청하며 그 대가로 장보고의 정치적 진출을 약속하였음.

 ▶ 839 장보고는 군대를 동원해 민애왕을 제거하고 제45대 신무왕(김우징)으로 즉위시켰으나,
 ▶ 839 신무왕은 곧 사망하고 그의 아들 제46대 문성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음.
 ▶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 했지만, 중앙 진골 귀족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신라 중앙과 장보고 세력의 관계는 점차 악화하였음. 

 ▶ 840 장보고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교섭을 시도했지만, 거부됨.

■ 사후
□ 청해진의 해체
 ▶ 846년 봄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시도하였음.
 ▶ 그러나 염장이 거짓으로 접근해 장보고를 암살하면서, 청해진은 지도자를 잃고 급속히 약화되었음. 
 ↘ 청해진 세력과 중앙 귀족 세력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표출된 것이거나, 중앙 귀족 세력에 의한 정치적 암살로 이해됨.
 ▶ 이후 장보고의 아들과 부장들이 청해진을 유지했지만, 청해진 세력은 결국 신라 중앙군의 공격으로 붕괴했으며,
 ▶ 851 신라 조정은 청해진 주민을 벽골군(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폐지함.

□ 호족 세력의 성장
 ▶ 장보고가 보여준 지방 세력의 자립과 실력 중심 질서는 신라 말 골품제의 한계를 드러내며, 이후 견훤, 궁예, 왕건과 같은 호족들이 군사·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흐름으로 계승됨.

□ 완도 청해진 유적
 ▶ 1991~2001 완도 앞바다의 작은 섬인 장도( 완도 청해진 유적 , 사적 제308호)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성곽과 방어시설, 접안시설, 건물지, 제사 유구를 비롯해 각종 토기 등이 확인되었음.




# 참고 자료
중학교 역사2, 금성출판사 2023
중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장보고]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6.1.31
[청해진]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6.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