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부마민주항쟁

부마항쟁
1979년, YH무역 사건 직후

경제 위기와 YH무역 사건 등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졌고,
김영삼 제명과 신민당 의원 전원 사퇴 등을 계기로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남.
이에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통해 강경 진압에 나섰음.

부마항쟁

■ 배경
□ 반정부 운동 확산
 ▶ 1978 유신체제 아래에서 박정희는 간접선거를 통해 9대 대통령으로 재집권했지만,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의 득표율이 증가하며 정권의 통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음.
 ▶ ~1979 유신체제 기간 9차례 긴급조치를 발동하며 국민을 통제했으나, 오히려 반정부 운동은 더욱 확산됨.

□ 경제 위기
 ▶ 1979.4 2차 석유파동(1978) 이후, 정부가 내놓은 긴축 중심의 ‘경제안정화정책’은 중소기업 도산과 심각한 물가 상승을 초래해 서민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음.
 ↘ 인플레이션 압박에 대응해 시행된 경제안정화정책은, 자금력이 약한 기업과 서민층에 충격을 주며 경제적 약자들을 위기로 몰아넣음

□ YH무역 사건
 ▶ 1970년대 후반 경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결성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늘어났고,
 ▶ 1979.8 그 흐름은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으로 이어졌음.
 ▶ 이에 대한 정부의 강경 진압과 김영삼 총재 제명은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반유신 운동으로 이어갔음. 

■ 부마민주항쟁
□ 부산에서 시작
 ▶ 10.15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처음 배포되며
 ▶ 10.16 오전 도서관 앞에서 시작된 500여 명의 학생 시위는 점차 가두시위로 확산했음. 
 ▶ 10.16 오후 시위대는 시내 중심가로 진출해 경찰과 충돌했고, 동아대학교 학생들까지 합류하며 규모가 더욱 커짐.

 ▶ 10.17 학생 시위가 격화되자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합류하기 시작하며 항쟁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고, 
 ▶ 10.17 밤 고등학생과 자영업자, 노동자들도 참여하여 관공서 등을 공격하는 야간 시위로 번져갔음.

□ 마산으로 확산
 ▶ 10.18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 경남대 학생들과 시민들이 시내에 집결하며 시위가 본격화되었고,
 - 야간 시위가 격화되며 주요 관공서를 공격했음.

□ 정부의 강경 진압
 ▶ 10.18 정부는 18일 자정 부산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강경 진압에 나섰으며, 시민들을 연행해 군사재판에 넘겼음.
 ▶ 10.19 오후 시위대가 약 8,000명에 이르자
 ▶ 10.20 정부는 마산과 창원 지역에도 위수령을 발동했고, 군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연행하고 군사재판에 넘김.
 ↘ 위수령은 군이 치안 유지를 위해 특정 지역에 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긴급 조치

 ▶ 10.24 정부는 군·검 합동 특별수사부를 구성해 ‘깡패 소탕’을 명목으로 시민들을 검거·구속하며 항쟁을 진압했음. 

■ 이후
 ▶ 정권 내부에서는 부마민주항쟁 진압과 사태 수습 방식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며 권력 내부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심화되었고,
 ▶ 10.26 결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하면서 18년에 걸친 유신 정권은 막을 내림. 

 ▶ 2013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식 위원회가 구성되고,
 ▶ 2019.9 부마민주항쟁의 시작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됨.




# 참고 자료
중학교 역사2, 금성출판사 2023
중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고등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부마민주항쟁]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