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고구려는 영류왕은 당(618 >)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 630(?)
당이 동돌궐을 제압하며 압박을 강화하자
▶ 631
천리장성 축조에 나섰고,
▶ 642년 10월
이를 맡았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였음.
■ 즉위 이후
▶ 642년 10월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한 뒤 그를 명목상의 군주로 두고,
자신이 주도하는 귀족 연립적 권력 구조 속에서 실권을
장악함.
▶ 이어 군사 지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를
연개소문이 억류하였음.
▶ 643.3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에 도사를 요청해 도교의 도입과 진흥을 시도함.
↘ 이는 당이 중시하던 도교를 받아들여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려는 목적이 담겨있음.
□ 1차 고구려-당 전쟁
▶ 645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명분으로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고구려가 안시성에서 완강히 버티며 이를 저지했음.
▶ 이후
당은 전면전 대신 장기 소모전 전략으로 방향을 바꿈.
- 647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완공함.
▶ 649
당 고종이 황제에 올라 고구려 정복 정책을 밀어붙임.
□ 2차 고구려-당 전쟁
- 660
백제 멸망 이후 고구려는
주변의 우호 세력을 잃고 고립되었음.
▶ 661
당 고종은 부대를 나누어 압록강 하류에서 요동의 고구려군을 차단하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두 전선을 단절시킴.
- 하지만
철륵이 반란을 일으키고 거란의 움직임까지 겹치면서 요동 방면의 당군이
철수하였고,
▶ 평양 인근에 고립된 당군은 고구려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봄.
□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
▶ 666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연남생과 연남산 등이 권력을 계승해 국정을
장악했으나
▶ 곧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패한 연남생이
망명해 당군의 선봉이 되면서 고구려의 방어 체계가 위협받음.
□ 고구려 멸망(3차 고구려-당 전쟁)
▶ 667 당군은
신성·부여성 등을 비롯한 북서 요충지를 차례로 함락한 뒤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일대까지 장악했고,
- 신라군도 당과 합류해
평양성을 한 달 넘게 포위했음.
▶ 668년 9월 결국
고구려가 항복하자
보장왕은 가족과 함께 당의 장안으로 압송되었고,
▶ 668 평양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음.
▶ 이후 보장왕은
실권이 없었던 점이 참작되어 사면된 뒤 사평태상백 원외동정(명예직)에
임명됨.
□ 고구려 멸망 이후
▶ 670 고구려 부흥
운동과 나당전쟁의 여파로 당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 신성(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으로 옮겼고,
▶ 676.2
다시 요동성(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으로 후퇴시키면서
▶ 677.2
보장왕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 겸 조선왕으로 임명해 그 통치를
맡김.
▶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해
부흥을 꾀했으나 사전에 드러나 소환되었고,
▶ 681
공주(지금의 중국 쓰촨성 충라이시)로 유배되었으며 요동의 고구려
유민들은 각지로 강제 이주당했음.
■ 사후
▶ 682(?)
보장왕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지며,
▶ 사후
위위경으로 추증된 뒤 시신이 장안으로 옮겨져 동돌궐의 마지막 통치자인
힐리가한의 묘 왼쪽에 안장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