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문무왕은 김춘추와 문명부인(김유신의 누이)
사이에서 태어났음.
▶ 650
나당 군사동맹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정치적 기반을 다졌고,
▶ 654
29대 무열왕 즉위 직후
병부령에 임명되어 국가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음.
▶ 655
이후 태자로 공식 책봉되었으며,
▶ 660
백제 정벌 전쟁에 직접
참여해 큰 공을 세웠음.
■ 재위 기간
▶ 661년 6월
무열왕이 세상을 떠난 뒤, 즉위한 문무왕은 백제 부흥 운동 진압을
이어갔음.
□ 2차 고구려-당 전쟁
▶ 661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 공략에 나섰으나,
- 신라는
백제 부흥 운동 진압과 당의 침략 가능성을 경계하여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고,
▶ 662
이후 당군이 패배로 식량 부족과 혹한에 시달리자, 문무왕은 김유신을
파견해 당군의 퇴각을 지원함.
□ 백제 부흥 운동 진압
▶ 663 백제
부흥군의 거점을 차례로 제압한 뒤,
▶ 663.8
백강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 부흥 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음.
▶ 663.9 이어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을 함락함.
□ 당과의 결전을 준비
▶ 663 당은 약속과
달리 백제의 옛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이를 당의 직접 지배 아래
두었으며,
▶ 663
신라에는 계림대도독부를 두고 문무왕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음.
▶ 665
이어 웅진도독인 백제 태자 출신 부여융과 취리산에서 신라와의 화의를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함.
- 이전부터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신라는 점차 당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게 됨.
□ 고구려 멸망
▶ 당이 고구려 공격을 추진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신라 원정군을 편성하였음.
▶ 668년 9월 신라의 정예군은 당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 668.11 문무왕은
선조 왕들의 사당에 백제와 고구려 평정을 고했음.
□ 고구려 부흥 운동 지원과 백제 영토 회복
- 당이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사이
서쪽에서는 토번이 세력을 확장하며 실크로드를 장악하려 하였고, 당이
신라까지 자국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보이자,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준비함.
↘ 토번은 7~9세기에 존속한 티베트 왕국으로,
실크로드 요충지를 압박하며 당과 대립함
▶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 670.7
당군에 밀려 망명한 고구려 부흥 세력을 금마저에 머물게 하여 보덕국을
세우게 하였음.
- 670.7
이어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공격하며 당에 맞선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돌입하였고,
↘ 670년 7월, 당은 대비천 전투에서 토번에
대패하여 서방에서 큰 군사적 타격을 입음
▶ 671 이후 백제
전역을 장악해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해당 지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하였음.
□ 삼국 통합을 위한 행정·군사 제도의 정비
▶ 671 > 문무왕은
늘어난 행정·군사 업무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 관부의 실무 담당자 정원을
증원하였음.
▶ 672
또한 백제 유민을 선발해 백금서당을 조직함으로써 피정복 세력을 군사
체제에 편입하였고,
▶ 674 외위를 폐지해 신라인과 고구려·백제인 사이의 차별을
완화하였음.
↘ 외위(外位)는 정복지 지배층(지방인)에게 부여한
관등
▶ 675 더 나아가
모든 관부와 지방 행정 단위인 주·군에 동인(銅印)을 제작해 반포함.
↘ 중앙과 지방의 행정 조직을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각 기관의 공적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부여했음을 의미
□ 삼국 통일 완성
▶ 675.9 문무왕은
매소성 전투와
▶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에서의 승리로 당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며
삼국통일을 완성함.
▶ 이후에도 당의 재침과 왜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전쟁 준비를 이어갔음.
▶ 678
북원소경(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을 설치하고,
▶ 680
금관소경(지금의 경남 김해시)을 두어 넓어진 영토에 대한 지방 행정
체제를 정비함.
■ 사후
▶ 681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신하들은 유언에 따라 대왕암( 경주 문무대왕릉 , 사적 제158호)에서 장사를 지냈음.
□ 문무왕 설화(호국룡설화)
▶ 682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문무왕의 뜻을
이어 감은사( 경주 감은사지 , 사적 제31호)를 완공함.
▶ 신문왕은 이견대에서 만난
용을 통해 문무왕이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 682 이후
용이 된 문무왕을 배알하기 위해 이견대( 경주 이견대 , 사적 제159호)를 세움.
▶ 682
바다에서 작은 산이 떠온다는 보고를 받은 신문왕은 문무왕이 바다의
용이 되어 김유신과 함께 신라를 수호하고 있으니, 해변으로 나가면
보배를 얻을 것이라는 점괘에 따라 이견대로 나가 대나무를 얻어
피리(만파식적)를 만듦.
□ 이후
▶ 1964
학술조사단의 조사가 시작되어 대왕암은 문무왕 관련 사료와 주변
유적과의 연관성, 인공적으로 조성된 구조와 정확한 방위 등을 근거로
신라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으로 비정함.
- 화장 후
유골을 뿌린 산골처로 보는 견해도 있음.
▶ 1970s
발굴 조사 결과, 감은사 금당 주춧돌 아래에 바다와 연결된 물길을 두는
독특한 구조가 밝혀졌는데, 이는 용이 된 문무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의도한 설계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