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신라 30대 문무왕

김법민, 29대 무열왕의 장남, 31대 신문왕의 아버지
661부터 681년까지 약 21년 동안 왕위에 있었음.

문무왕은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며 통일 전쟁을 마무리할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음.
이후 당의 한반도 직접 지배 시도에 맞서 싸워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으며,
통일 이후에는 유민 통합과 행정·군사 제도 정비를 추진함.

문무왕

■ 즉위 이전
 ▶ 문무왕은 김춘추와 문명부인(김유신의 누이) 사이에서 태어났음.
 ▶ 650 나당 군사동맹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정치적 기반을 다졌고,
 ▶ 654 29대 무열왕 즉위 직후 병부령에 임명되어 국가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음.
 ▶ 655 이후 태자로 공식 책봉되었으며,
 ▶ 660 백제 정벌 전쟁에 직접 참여해 큰 공을 세웠음.

■ 재위 기간
 ▶ 661년 6월 무열왕이 세상을 떠난 뒤, 즉위한 문무왕은 백제 부흥 운동 진압을 이어갔음.

□ 2차 고구려-당 전쟁
 ▶ 661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 공략에 나섰으나,
 - 신라는 백제 부흥 운동 진압과 당의 침략 가능성을 경계하여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고,
 ▶ 662 이후 당군이 패배로 식량 부족과 혹한에 시달리자, 문무왕은 김유신을 파견해 당군의 퇴각을 지원함.

□ 백제 부흥 운동 진압
 ▶ 663 백제 부흥군의 거점을 차례로 제압한 뒤,
 ▶ 663.8 백강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 부흥 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음.
 ▶ 663.9 이어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을 함락함. 

□ 당과의 결전을 준비
 ▶ 663 당은 약속과 달리 백제의 옛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이를 당의 직접 지배 아래 두었으며,
 ▶ 663 신라에는 계림대도독부를 두고 문무왕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음.
 ▶ 665 이어 웅진도독인 백제 태자 출신 부여융과 취리산에서 신라와의 화의를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함.
 - 이전부터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신라는 점차 당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게 됨.

□ 고구려 멸망
 ▶ 당이 고구려 공격을 추진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신라 원정군을 편성하였음.
 ▶ 668년 9월 신라의 정예군은 당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 668.11 문무왕은 선조 왕들의 사당에 백제와 고구려 평정을 고했음.

□ 고구려 부흥 운동 지원과 백제 영토 회복
 - 당이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사이 서쪽에서는 토번이 세력을 확장하며 실크로드를 장악하려 하였고, 당이 신라까지 자국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보이자,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준비함.
 ↘ 토번은 7~9세기에 존속한 티베트 왕국으로, 실크로드 요충지를 압박하며 당과 대립함

 ▶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 670.7 당군에 밀려 망명한 고구려 부흥 세력을 금마저에 머물게 하여 보덕국을 세우게 하였음.
 - 670.7 이어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공격하며 당에 맞선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돌입하였고,
 ↘ 670년 7월, 당은 대비천 전투에서 토번에 대패하여 서방에서 큰 군사적 타격을 입음
 ▶ 671 이후 백제 전역을 장악해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써 해당 지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하였음.

□ 삼국 통합을 위한 행정·군사 제도의 정비
 ▶ 671 > 문무왕은 늘어난 행정·군사 업무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 관부의 실무 담당자 정원을 증원하였음.
 ▶ 672 또한 백제 유민을 선발해 백금서당을 조직함으로써 피정복 세력을 군사 체제에 편입하였고,
 ▶ 674 외위를 폐지해 신라인과 고구려·백제인 사이의 차별을 완화하였음. 
 ↘ 외위(外位)는 정복지 지배층(지방인)에게 부여한 관등
 ▶ 675 더 나아가 모든 관부와 지방 행정 단위인 주·군에 동인(銅印)을 제작해 반포함.
 ↘ 중앙과 지방의 행정 조직을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각 기관의 공적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부여했음을 의미

□ 삼국 통일 완성
 ▶ 675.9 문무왕은 매소성 전투와
 ▶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에서의 승리로 당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며 삼국통일을 완성함. 
 ▶ 이후에도 당의 재침과 왜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전쟁 준비를 이어갔음.

 ▶ 678 북원소경(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을 설치하고,
 ▶ 680 금관소경(지금의 경남 김해시)을 두어 넓어진 영토에 대한 지방 행정 체제를 정비함.

■ 사후
 ▶ 681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신하들은 유언에 따라 대왕암( 경주 문무대왕릉 , 사적 제158호)에서 장사를 지냈음.

□ 문무왕 설화(호국룡설화)
 ▶ 682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문무왕의 뜻을 이어 감은사( 경주 감은사지 , 사적 제31호)를 완공함.
 ▶ 신문왕은 이견대에서 만난 용을 통해 문무왕이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 682 이후 용이 된 문무왕을 배알하기 위해 이견대( 경주 이견대 , 사적 제159호)를 세움.
 ▶ 682 바다에서 작은 산이 떠온다는 보고를 받은 신문왕은 문무왕이 바다의 용이 되어 김유신과 함께 신라를 수호하고 있으니, 해변으로 나가면 보배를 얻을 것이라는 점괘에 따라 이견대로 나가 대나무를 얻어 피리(만파식적)를 만듦.

□ 이후
 ▶ 1964 학술조사단의 조사가 시작되어 대왕암은 문무왕 관련 사료와 주변 유적과의 연관성, 인공적으로 조성된 구조와 정확한 방위 등을 근거로 신라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으로 비정함.
 - 화장 후 유골을 뿌린 산골처로 보는 견해도 있음.

 ▶ 1970s 발굴 조사 결과, 감은사 금당 주춧돌 아래에 바다와 연결된 물길을 두는 독특한 구조가 밝혀졌는데, 이는 용이 된 문무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의도한 설계로 추정됨.

문무왕


# 참고 자료
[문무왕]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2.27
[대왕암]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