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461
21대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왜(일본)에 파견하여 양국 간의 우호와 군사적 협력 관계를 강화했음.
▶ 462
곤지의 장남인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태어난 직후 곧바로 백제로 돌아온 것으로 전해짐.
□ 웅진 천도
▶ 475 한성이
고구려에 함락되면서 개로왕이 전사하자, 22대 문주왕은 나라의 중심을
웅진으로 옮겼음.
▶ 479
이후 24대 동성왕이
즉위하여 백제를 이끌었으나,
▶ 재위 후반에는 측근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내부 정세가 점차 불안해졌음.
■ 재위 기간
▶ 501년 동성왕이
백가에게 시해된 뒤, 무령왕이 왕위에 오름.
□ 신구 귀족의 균형
▶ 즉위 직후 백가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은 이를 진압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했음.
▶ 좌평직을
세분화하고, 신구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확립함.
□ 대고구려 전쟁
- 501? 즉위
직후, 무령왕은 고구려를 공격하며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펼침.
▶ 이에
대응해 고구려가 말갈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자, 무령왕은 목책과 성을
쌓아 방어를 강화했음.
▶ 이후에도 무령왕은 직접 군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으나,
신라 지증왕은
나제동맹의 관계에도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우선시하였음.
↘ 전투는 한강 유역 일대에서 벌어졌음.
□ 담로제
- 무령왕은 왕족을 담로의 책임자로 파견해 지방을 통치하게
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중앙 통치 체제에 편입시키고 왕권을
강화함.
□ 섬진강 유역 확보
▶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여 가야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함.
▶ 521
무령왕은 양나라에 백제의 부흥을 알리는 표문을 보냈고, 양이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함.
↘ 신라 사신이 함께했으며 나제동맹은 여전히
유지됨.
□ 자연재해
- 웅진 천도 이후 가뭄과 홍수가 계속되었는데,
무령왕은 제방을 쌓고 유민을 정착시켜 농업 생산을 회복시켰음.
▶ 그
결과 조세와 노동력이 증가하고 사회적 혼란이 진정되면서, 백제의 국가
체제가 점차 안정됨.
■ 사후
▶ 523년
무령왕이 세상을 떠나고, 성왕이 즉위함.
□ 무령왕릉
▶ 1971 무령왕릉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도굴 피해 없이 완전한 형태로
조사되었음.
- 내부의 묘지석을 통해 무덤의 주인이
밝혀졌으며, 이는 한국 고대사에서 연대가 명확히 확인된 유일한
왕릉으로 평가됨.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사적 제13호)에서는 약 4,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그중
12점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