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19.2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 1919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되면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함.
□ 1921년의
임시정부
- 이동휘(49)를 중심으로 한 한인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며 이승만과 대립함.
- 박용만(41)이
군사통일회를 결성하고 무장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이승만 타도와
임시정부 개혁을 추진함.
- 안창호(44)는
임시정부와 상하이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흥사단을 확장함.
- 박은식(63)·김창숙·원세훈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함.
▶ 1921.6
이러한 압박 속에서 이승만은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동지회 설립을
추진함.
■ 대한인동지회
▶ 1921.7 임시정부 내 입지가 약화된 이승만(47)은 독자적 정치기반
확보를 위해 대한인동지회를 설립함.
-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단체지만, 실제로는
이승만이 쉽게 통제할 수 있도록 소수의 직원으로 구성됨.
- 하와이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대한인하와이교민단으로 개칭하여 존재함.
▶ 1924.11
하와이한인대표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강화하고 정강을 제정함.
- 3·1
운동 정신 계승, 상명하복 체제 구축, 경제적 능력 배양
□
지회 설립 및 내부 갈등
▶ 1925년 초
상하이 지회 설립
▶ 1925.12~1931.4
동지식산회사를 운영하며 자립을 추진했지만, 재정난과 경제 대공황의
영향으로 파산함.
▶ 1928.1
뉴욕 지회 설립
▶ 1930.7
동지미포대표회를 개최했지만, 하와이 교민단과 충돌하며 법정소송으로
이어짐.
- 1931.11~1935.1
이승만은 해외 외교활동에 나섬.
□ 세력 확장
▶ 1931.12 구미위원부를 통해 이승만(57)의 외교적 후원을 강화하며 해외
한인의 단결을 촉구해 세력을 회복함.
↘ 구미위원부는 임시정부가 외교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운영한 조직
▶ 1933.4
대한인동지회는 하와이 한인연합협의위원회를 설립하며 세력을
확장함.
▶ 1935~
대한인동지회와 대한인국민회는 합동을 추진되었지만 무산됨.
▶ 1939
이승만 중심의 외교 체제를 추진한 대한인동지회와 중한민중동맹단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자,
- 북미 대한인국민회가
조정하며 이승만 1인 체제로 외교가 결정됨.
▶ 1941.4
북미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한인동지회 등이 주도하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함.
- 임시정부의 외교력
강화와 해외한인의 임시정부 후원 방안을 논의하고,
- 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함.
□ 분열과
확장
▶ 1943.12 이승만(69)은 주미외교위원부 문제로 재미한족연합회와 갈등을
빚은 끝에 대한인동지회를 탈퇴시켰고,
↘ 주미외교위원부는 워싱턴에 설치된 대미
외교기관
- 이로 인해 동지회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했지만,
이후 이승만은 종신 총재로 추대됨.
▶ 1942
대한인동지회 북미 지부들은 시카고에서 북미동지대표회를 열어
북미동지회 총지부를 결성하고,
- 대한인국민회와 경쟁과 협력을 이어가면서 이승만의 강력한 후원세력이
됨.
▶ 1943
북미동지회 총지부를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로 개명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며 세력을 확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