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640(선덕여왕 9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처음으로 당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됨.
□ 신라의 위기
▶ 642 신라는
백제가
대야성 등을 함락하면서 국가적 위기에 빠졌고,
▶ 647
이어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은 이를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추대하였음.
▶ 이후
김춘추는 실권을 바탕으로
대내외 위기 극복을 위한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상함.
□ 국학의 시작
▶ 648 김춘추는
당과의 군사 동맹을
모색하는 한편 당의 국학에서 유교 교육을 참관하며 유교적 통치질서에 관심을
보였고,
▶ 651년 이를
바탕으로 대사를(국학 관료 2인) 두었음.
→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660),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668)
신라-당 전쟁(670 >)을 거쳐 삼국 통일을
완성함(676).
■ 국학의 운영
□ 국학 제도 완비
▶ 682년 신문왕이 위화부
정비와 국학 설치를 통해 관료 선발과 양성을 제도적으로
완성하였음.
- 국학은 ‘논어’와 ‘효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하였으며,
- 9년의 교육과정을 두고
15~30세까지 입학을 허용하여 초임 관료 교육과 재교육을 함께
담당하였음.
■ 이후
- 728 신라는
당에 다시 유학생을 파견함.
▶ 국학은
경덕왕 대(742 >)에 태학감으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대(765 >)에 다시 국학으로 환원되었음.
□ 독서삼품과 시행
▶ 788년 독서삼품과가 시행되어 유교 경전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였음.
- 국학 학생들만 대상으로 하진 않았지만,
국학에서 익힌 유교적 소양이 관료 등용으로 직접 연결되었음을
보여줌.
▶ 799
국학생의 녹읍을 지정하여 국학의 재정 기반을 강화함.
□ 국학의 쇠퇴
▶ 희강왕, 문성왕 대(836 >) 당 유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국학의 위상은 점차 저하된 것으로
보이며,
▶ 경문왕 대(861 >)
이후 신라는 국학의 명칭을 국자감으로 바꾸고 국자학·태학 등으로 교육
체제를 개편하였음.
▶ 889
그러나 원종과 애노의 난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잇따르면서 국학은 점차
제 기능을 상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