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고구려 부흥 운동


670년부터 684년까지 약 15년간 이어짐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검모잠과 안승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음.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호로하 전투에서 패배하며 부흥 운동의 전투 국면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이후 안승을 중심으로 보덕국이 유지되었으나, 결국 신라에 의해 해체되었음.

고구려 부흥운동

■ 고구려 멸망
 ▶ 668년 9월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였고, 보장왕과 지배층은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끌려갔음.
 - 당은 멸망의 책임을 연개소문에게 돌려 보장왕을 처벌하지 않았고, 고구려 영토를 재편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음.
 - 또한 고구려 백성을 강남·회남 등지로, 지배층은 당 내지로 이주시켜 본토의 물적·인적 기반을 분리함으로써 반란 가능성을 억제함.

■ 고구려 부흥 운동
 - 670.3 신라와 고구려 부흥 세력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의 오골성을 선제공격함.

□ 검모잠의 부흥 운동
 ▶ 670년 4월 검모잠은 수임성(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서 백성들을 규합해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음. 
 ▶ 이어 신라로 망명했던 안승(고구려의 왕족)을 맞이해 왕으로 삼고, 신라에 고구려 부흥 운동에 대한 협조를 요청함.

 ▶ 이후 검모잠은 안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안승은 다시 신라로 돌아갔음.

□ 안승의 부흥 운동
 ▶ 670.7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그를 금마저(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 머물게 했음. 
 ↘ 익산은 안승이 북방 본토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는 동시에, 외세인 당군의 침입을 막고 옛 백제 지역의 민심까지 견제할 수 있는 위치
 ▶ 671.7 이후 당군이 안시성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였고,
 ▶ 672.7~8 이어 당군이 평양 일대를 공략하자 신라·고구려 부흥 연합군이 이에 맞섰으나 결국 패배하였음.
 ▶ 672.12 백수산 전투에서도 신라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고구려 부흥군은 다시 패하였고,
 ▶ 673.5 호로하(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당군에게 패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의 마지막 전투가 막을 내림. 

□ 보덕국 건국
 - 당은 신라가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자, 당에 머물던 김인문(문무왕의 동생)을 신라 왕으로 세우려 했음.
 ▶ 674 그러나 문무왕은 안승을 다시 보덕왕으로 책봉함.

□ 신라의 삼국 통일과 보덕국의 멸망
 - 676 신라는 신라-당 전쟁에서 승리하며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냄.

 ▶ 680.3 문무왕은 여동생(조카?)을 안승에게 시집보내 안승을 왕실 일원으로 편입시키고,
 ▶ 683년 10월 관직과 김씨 성을 내려 진골 귀족으로 만든 뒤, 거처를 경주로 옮기게 하여 보덕국을 사실상 해체하였음. 

 ▶ 684.11 이에 안승의 조카인 장군이 보덕성에서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 신라는 이를 진압한 뒤 금마저의 고구려 유민을 경주 남쪽으로 강제 이주시키며 보덕국은 완전히 멸망함.

■ 이후
 ▶ 698 이후 고구려 유민 세력은 동북 지역에서 발해를 건국해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자리 잡음.

고구려 부흥 운동


# 참고 자료
중학교 역사2, 금성출판사 2023
중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고구려 부흥운동]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