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433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에 함께 대응하기 위한
군사동맹을 맺음.
■ 재위 기간
▶ 455년 비유왕이
세상을 떠나고, 개로왕이 즉위함.
↘ 비유왕의 죽음은 흑룡의 출현과 함께 기록되었고,
비유왕의 시신이 오랫동안 임시매장된 데다 개로왕 초기의 기록마저
없어, 개로왕의 즉위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임.
□ 왕권 강화
▶ 458 개로왕은 송에 사신을 보내 백제 왕족에게 작위를 부여하며
군사권을 강화했고, 이에 따라 왕과 왕족 중심의 정치 체제로
정비됨.
□ 고구려의 고립을 시도
▶ 461 개로왕은
좌현왕인 동생 곤지를 왜에 파견하여 우호 및 군사적 협력 관계를
강화함.
▶ 472
개로왕은 20년 만에 북위에 대한 조공을 재개하며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 북위는 고구려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이를 거절함.
▶ 백제는 송에 이어 북위와의 외교까지 단절되었고, 이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자극하는 계기가 됨.
□ 한성 함락
▶ 고구려는 백제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도림을
첩자로 보내었고, 그의 간언에 따라 개로왕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국력이 약화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음.
▶ 475
장수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군을 네 갈래로 나누어 북성( 풍납토성, 사적 11호 )과 남성( 몽촌토성, 사적 297호 )을 포위함.
▶ 백제는 7일간 저항했으나 결국 북성이
함락되었고,
▶ 남성에 있던 개로왕은 탈출을 시도하다 고구려 장수에게
사로잡혀 아차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함.
□ 도미 설화
- 개로왕이 ‘편호소민’인 도미의 아내를 탐하자
도미 부부가 고구려로 도망치는 이야기로, 당시 백제 사회의 혼란과
평민층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 편호소민은 호적에 등록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는 계층을 말함.
■ 사후
- 475 개로왕의
아들(또는 동생) 문주가 신라군과 함께 한성에 돌아왔으나 이미 함락된
뒤였으며,
▶ 백제는 한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재건을 도모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