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국제통화기금
▶ 1944 미국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달러를 중심으로 한 고정환율제와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세계은행) 창설이 결정되며
브레턴우즈 체제가 형성됨.
▶ 1945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 IMF와 IBRD가 설립되었고,
↘ IMF는 국제적인 통화 문제 해결을 위해
회원국들이 조성한 자금(기금)을 활용하는 국제기구이고, IBRD는
개발도상국의 경제 개발과 재건을 위해 장기 저리의 자금을 대출해주는
국제 금융기구
▶ 1947.3 준비
과정을 마친 IMF는 IBRD와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함.
- IMF는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경제 정책에 개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를 확산·유지하는 역할을 함.
▶ 1955
한국이 IMF에 가입함.
□ 단기 외국 자본 증가
▶ 1993 한국 정부는
금융기관의 단기 외채 조달을 허용했음.
▶ 이에 따라
많은 금융기관이 금리가 낮은 일본 등에서 대규모 자금을 차입했고,
▶ 1996 그 결과 전체 외채 중 단기 외채 비중이 61%에
이르렀음.
■ 외환 위기 발생
- 당시 한국 경제는 급격한 자본시장 개방,
금융감독의 미비, 무리한 기업 확장 등 구조적 문제로 외부 충격에
취약한 상태였음.
□ 한보 사태
▶ 1997.1
한보그룹은 무리한 사업 확장과 정치권 로비에 의한 과도한 대출이
누적되며 결국 부도를 맞았음.
▶ 한보의 부도로
은행들은 빌려준 돈을 회수하지 못해 부실화되었고, 정부는 과거와 달리
부실 은행에 대해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밝힘.
▶ 이러한
상황은 외국 투자자들에게 한국 경제의 위험 신호로 인식되어, 자금
회수와 함께 한국 시장에서 빠져나가는 움직임으로 이어졌음.
▶ 이에
정부가 외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내세웠지만, 시장은 이를 신뢰하지
않았음.
□ 신용 경색
▶ 한보 부도 이후 은행들이 대출을 제한하기
시작하면서,
▶ 1997.3~12
부채가 많던 삼미와 진로, 대농,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고려증권,
한라 등 재벌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짐.
□ 아시아 금융위기
▶ 1997.7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외국 자본은 아시아 신흥국 전체를 위험 지역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 태국 경제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외국 단기 자본이
투자금을 회수하자, 태국 정부는 바트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투입하며 방어에 나섰음. 그러나 달러 유출이 계속되면서
외환보유액이 고갈됐고, 결국 더는 환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
이에 태국은 고정환율제를 포기했고,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경제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됨.
▶ 1997 여름 그
여파로 외국 금융기관, 특히 일본 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준 자금을 서둘러
회수하기 시작했음.
▶ 1997.11
이 때문에 한국의 외화 사정은 급격히 악화됨.
□ 국제통화기금에 차관 요청
▶ 1997.11 한국
정부는 외환위기 대응을 위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IMF
총재의 비밀 방한과 함께 협상이 진행되었음.
▶ 1997년 12월 3일 결국 한국은 IMF와 구제금융 협상을 타결지음.
■ 이후
□ 사회에 미친 영향
-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한국은 외국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경제를 개방해야 했음.
▶ 자본
이동의 자유화로 단기 외국 자본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외환시장과 화폐
가치가 불안정해졌고,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던 한국 기업들은 외국
자본에 사업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음.
▶ IMF는 긴축 재정과 고금리 정책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자금난이 심화되면서 한계 기업은 물론 우량 기업까지 줄줄이 부도에
직면했음.
▶ 그 결과 실업자가 급증했지만, 미비한 복지
시스템과 축소된 복지 예산 때문에 취약 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음.
□ 금 모으기 운동
▶ 1998.1 금 모으기
운동은 외환보유액을 늘리기 위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을 모은 대규모
캠페인이었으며,
- 정부와 언론의 호소에 응답한
국민이 적극 참여해 국가적 위기 극복에 힘을 보탰음.
□ 차관 상환
▶ 2000.12
IMF로부터 빌린 차관을 모두 조기 상환했고,
▶ 2001.8 IMF가 한국의 구조조정 및 경제 개혁 이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관리 체제가 완전히 종료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