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CE 1
무휼(대무신왕)에게는 두 형이 있었지만, 큰형은 요절했고
▶ CE 8
둘째 형은 국내성 천도에 불참하여 제2대 유리왕이 자살케 함.
- 이
무렵 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했고, 이후에도 부여의 대립은 지속됐음.
□ 무휼의 출생과 태자 책봉
▶ CE 4 유리왕과
다물국왕 송양 사이에서 무휼이 태어남.
▶ CE 9
6세의 무휼은 부여왕 대소의 사대 요구를 거절하며 사신을 꾸짖어
돌려보냈음.
▶ CE 13
이어 부여가 침입하자, 10세의 무휼은 이를 격퇴했고,
▶ CE 14
그 공로로 태자로 책봉되었음.
↘ 무휼의 공적은 후원 세력의 작용에 힘입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고구려의 최대 대외 과제였던 부여와의 대결에서 거둔
성과가 그의 태자 책봉과 즉위의 결정적 계기가 됨.
■ 즉위
▶ 기원후 18년
15세의 나이로 무휼이 왕위에 오름,
□ 부여와의 대립
▶ CE 20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도발하자,
▶ CE 21 겨울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에 나서 대소왕을 전사시켰으나, 강한 저항에 밀려
후퇴하였음.
-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정씨·괴유·마로 등 여러 세력을 포섭하고, 부여 왕실의 분열을
유발하여 세력을 약화시켰음.
□ 중국의 혼란
- 1C 초
한나라(전한) 말기의 혼란 속 낙랑군에서는 토착 세력의 반란이
이어졌으나 제대로 진압되지 못했고,
▶ 이 무렵 압록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가 남하의 기회를 잡았음.
□ 좌·우보제 실시
▶ CE 25 최고
관직이던 대보가 분화되며 우보가 처음 임명되었고,
▶ CE 27
이후 우보가 좌보로 승진하고 새로운 우보가 임명되면서 좌·우보 체제를
마련함.
□ 한나라와 대립
▶ CE 25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한 뒤 중국이 재편되는 동안,
▶ CE 26
고구려는 개마국·구다국 등 주변 소국을 병합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 CE 28
나아가 한의 요동군 공격까지 막아냈음.
▶ CE 32
왕자 호동의 기지로 고구려가 낙랑을 정벌하였으나,
↘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 사랑에 빠졌으나,
낙랑공주가 자명고와 뿔나팔을 부수면서 낙랑은 고구려에
항복함.
▶ CE 32 호동은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고 이후 해우가 태자로 책봉됨.
↘ 고구려가 멸망시킨 낙랑은 한 낙랑군 자체가
아니라 그에 복속된 한반도 서북 지역의 토착 소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함.
■ 이후
▶ 기원후 44년
대무신왕은 41세에 세상을 떠났고,
▶ 유력 귀족들이
태자 대신 그의 아우를 왕으로 추대하여 제4대 민중왕이 됨.
↘ 당시 고구려 왕권이 친자에게 곧바로 왕위를
세습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음을 보여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