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신라 제41대 헌덕왕

김언승, 제40대 애장왕의 삼촌, 제42대 흥덕왕의 형
809년부터 826년까지 약 18년 동안 왕위에 있었음.

애장왕을 시해하고 즉위한 헌덕왕은 왕권 강화를 추진했으나,
그 과정에서 정책에서 배제된 귀족 세력의 불만이 누적되었고, 결국 김헌창의 난이 발생하였음.

헌덕왕

■ 즉위 이전
□ 정치적 성장
 ▶ 790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인 김언승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 < 795 이후 이찬에 올라 병부령을 겸임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져 나갔음.

 ▶ 799 원성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제39대 소성왕이 즉위하였고,
 ▶ 800년 이어 소성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제40대 애장왕이 왕위에 오름.
 - 이때 병부령이자 숙부였던 김언승이 어린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을 함.

□ 김언승의 측근 권력 장악
 ▶ 801.2 김언승은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에 올라 왕의 근시 권력을 장악하고, 
 ↘ 김언승이 내성(왕실 재정 및 사무 관련)에서 어룡성(행차 관련)을 분리·독립시키고 그 위상을 격상시킨 것으로 보임.
 ▶ 상대등으로 취임해 정치 전반을 주도했음.

□ 애장왕 대 정치 개혁
 ▶ 애장왕은 오묘제를 개혁하여 제29대 무열왕제30대 문무왕의 사당을 별도로 분리하고,
 - 시조와 원성왕 계통의 직계 4대조로 오묘를 재구성하여 원성왕계를 독자적인 왕통으로 확립하고자 함. 

 ▶ 805 애장왕이 18세가 되면서 섭정은 형식적으로 종료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김언승에게 집중되어 있었다고 보임.

 ▶ 805.8 애장왕은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였는데, 이는 제35대 경덕왕 대의 한화 정책과 유사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봄.
 ▶ 이어 사찰 창건과 불교 행사에서의 사치를 제한하여 불교계의 폐단을 억제하고, 사찰과 연계된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음.
 ▶ 808 사신을 파견해 여러 군과 읍의 경계를 획정함으로써 지방 행정 질서를 정비함.

■ 재위 기간
 ▶ 809년 7월 김언승이 군사를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름. 
 ▶ 809.8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에 사신을 보내 애장왕의 죽음을 알렸다고 하나,
 ▶ 812 이후 헌덕왕에 대한 책봉이 이뤄짐.

□ 왕권 강화와 사회 불안의 심화
 - 왕위 찬탈을 도운 귀족과 6두품 세력의 협조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 정책을 이어갔으나, 이러한 소수 중심의 정국 운영은 배제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음.
 ▶ 814~821 한편 거의 매년 자연재해와 기근이 이어지며 사회 불안이 심화했고, 도적과 초적이 각지에서 발생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크게 피폐해졌음.

□ 귀족 세력의 반란
 ▶ 822.3 웅천주(지금의 충남 공주시) 도독인 김헌창이 국호를 ‘장안’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킴. 
 ▶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를 장악하였고, 조정은 여러 장수를 차례로 파견해 반란 진압에 나섰음.
 ▶ 관군의 공세로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난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종결됨.
 ▶ 이후 무열왕계는 왕위 계승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중앙 정치에서도 영향력을 상실하였음.

 ▶ 825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도적 세력과 함께 북한산주(한산주 북부, 현재의 서울 북부)를 공격하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됨.

■ 사후
 ▶ 826년 10월 헌덕왕이 세상을 떠나고( 경주 헌덕왕릉 , 사적 제29호), 동생이 흥덕왕으로 즉위함.
 ↘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에게 아들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심지가 헌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 참고 자료
[헌덕왕]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6.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