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률 발표했지만, 내부
갈등과 재정난으로 실행하지 못함.
▶ 윤봉길 의거(1932)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주로의 이동을 시작으로
1940년까지 계속 이동함.
▶ 1934 뤄양(낙양)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한국인 학생들이 간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함.
▶ 1937~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는 무장부대 창설을 추진했지만, 일본의 중국 점령지 확대
때문에 본거지를 계속 옮기며 광복군 창설은 계속 미뤄짐.
🌍 1939.9 2차 세계대전 발발
▶ 1940.5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광복군 창립과 활동 승인을 요청하고,
장제스는 한국광복군을 국민당군 지휘 아래 두는 조건으로 창설을
승인함.
■ 한국 광복군
□ 창설 및 초기 활동
▶ 1940.9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하고
▶ 9.15 김구 명의로 발표된 ’한국광복군 선언문‘에서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연합군 항전을 선언함.
▶ 9.17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여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총무처장 최용덕 등을 임명함.
▶ 1941.1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편입하여 3개 지대를 구성함.
▶ 1941.11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대신 작전권과 인사권을
중국이 갖는다는 요구를 제시하고, 임시정부는 이를 수용함.
↘ 1945년에 중국으로부터 한국광복군의
지휘통수권을 되찾음
□ 태평양 전쟁
▶ 1941.12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 12.1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 함.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하여 독립된
주권국으로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함.
▶ 1942.5
조선의용대 김원봉 등
병력 100여 명이 광복군 1지대로 편입되면서, 3개 지대를 개편함.
- 1지대는
김원봉이, 2지대는 이범석이, 3지대는 김학규가 지휘를 맡음.
□ 영국군과 연계(임팔전선 투입)
▶ 1942 영국군은
대일 작전을 위해 중국 내 한국인을 활용하고자 했고,
▶ 1943
김원봉과 협력해 ‘인면전구공작대’를 조직함. 이들은 인도에서 교육을
받고,
▶ 1944년 초
영국군에 분산 배치되어 미얀마 임팔전선에서 일본군 포로 심문과 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수행함.
□ 미국과 연계(독수리 작전)
▶ 1945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미국과 연계해,
한국광복군과 미국전략첩보국(OSS)의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함.
▶ 1945.1
한인 학병 출신 탈출자들이 광복군에 편입되어 정보요원으로 주목받으며,
OSS와의 협력이 본격화됨.
- 양측은 ‘독수리작전’을
통해 훈련된 요원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무기를
공급할 계획을 준비함.
▶ 8.6
그러나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이
작전은 결국 실행되지 못함.
■ 광복, 이후
▶ 1945.8 일본 항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병력 확대를 위해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들을 편입하는 ‘확군 사업’을 추진함.
▶ 1945.10
이에 지청천 등은 7개 도시에 잠편지대를 설치하여 일본군 내 한국인을
포섭함.
▶ 그러나 미군정은 군의 형태로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중국 국민당 정부도 ‘확군 활동’을 금지하고
한국인들의 강제 송환을 결정함.
▶ 1946.2~6
그 결과 한국광복군은 교민들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고,
▶ 1946.5 ‘한국광복군복원선언’을 끝으로 광복군의 활동은 사실상
종료됨.
↘ 광복군이 독립이라는 사명을 완수하고,
공식적으로 해산함을 알리는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