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탈해이사금

석탈해, 탈해왕
재위 기원후 57년부터 80년까지

신라에 들어온 석탈해는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고, 유리이사금에 이어 왕위에 오름.
박씨 세력과 연합하였고, 백제의 침입을 막으며 가야를 견제했음.

탈해이사금

■ 출생과 성장
□ 삼국사기에 기록된 탄생 설화
 ▶ 다파나국 왕과 여국왕의 딸 사이에서 7년 만에 알이 태어나자, 왕은 불길하다 하여 버리려 했으나 왕비가 궤작에 넣어 바다에 띄움.
 ▶ 궤짝은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사람들이 거두지 않았고,
 ▶ 기원전 19년 다시 흘러 진한의 아진포에 도착했을 때, 한 할머니가 궤짝을 건져 열어보니 그 안에서 아이가 나왔음. 
 - 할머니는 아이를 거두며 궤짝을 따라온 까치의 ‘작(鵲)’을 줄여 성을 석(昔)이라 하고,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라 지음.

□ 삼국유사에 기록된 탄생 설화
 ▶ 신라 2. 남해차차웅 대(기원후 4~24) 가락국 바다에 한 배가 도착했으나 머물지 않고 신라 아진포에 이르러, 까치가 모여든 상자 속에서 용성국 왕자라 밝힌 아이 석탈해가 나타났음.
 - 그는 어머니가 7년 만에 알을 낳았고, 아버지가 버린 궤를 붉은 용이 호위해 신라까지 이끌었다고 말함.
 ▶ 성장한 석탈해는 호공의 집터를 차지하기 위해 숯과 숫돌을 묻어두고 대대로 대장간이던 땅이라 속여 빼앗음.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석탈해 설화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외래 세력이 철기 기술을 기반으로 신라 사회에 정착하며 세력을 확장한 과정을 상징함.

□ 왕실의 사위가 됨
 ▶ 8 석탈해는 2.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 10 신라의 최고위 관직인 대보 자리에 오름.

 ▶ 20 2. 남해차차웅은 “왕위는 아들이나 사위가 아니라 나이가 많고 어진 자가 이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김.
 ▶ 20 이에 탈해가 “어진 이는 이가 많다”는 말에 따라 치아의 개수로 정하자고 제안하였고, 그 결과 유리이사금이 왕위에 오름.
 ↘ 이사금은 ‘이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의 잇금에서 비롯된 왕호로, 연장자 우선의 원칙을 반영한 것.

■ 재위 기간
 ▶ 3. 유리이사금은 임종을 앞두고 선왕의 뜻에 따라 이사금의 지위를 탈해에게 물려줌. 
 ▶ 기원후 57년 이에 탈해이사금이 즉위하였고,
 ▶ 즉위 직후 과거에 집을 빼앗았던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여 석씨와 박씨 세력의 연합을 공고히 함.

□ 치적
 ▶ 59 탈해이사금은 왜와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
 ▶ 64 백제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네댓 차례에 걸쳐 침략이 이어졌음.

 ▶ 67 또한 박씨 세력을 지방 관리로 임명해, 행정 구역(주와 군)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으며, 
 ▶ 77 황산진에서 가야군과 전투를 벌였음.

□ 삼국사기에 따른 김알지 탄생 설화
 ▶ 65(삼국유사에선 60년) 시림에서 들려온 닭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금궤 속에 단정한 아이가 있었고, 그가 곧 김알지였음. 
 ↘ 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며, 뒤이어 262년에 미추가 이사금의 자리에 오름.
 ▶ 이에 탈해이사금은 시림을 계림이라 고쳐 부르고 국호로 삼음.
 -  신라 계림 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됨.

■ 사후
 ▶ 80 탈해이사금이 세상을 떠나고, 5. 파사이사금이 즉위함.
 ↘ ‘삼국유사’에 따르면 탈해이사금은 죽은 뒤 초인적인 크기의 뼈로 나타나 신격화되어 동악신으로 모셔지며 국가 제사의 대상이 되었음.




# 참고 자료
[탈해이사금]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