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평운동의 등장
▶ 1894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차별은 이어짐.
▶ 1896
호구조사규칙 반포로 백정도 호적이 등재되었지만, 차별은 계속됨.
↘ 모든 국민을 호적에 등재하여 공식적인 신분을
부여했지만, 자신의 작업을 기재해야 함.
▶ 1896
관민공동회(만민공동회)에서 백정 박성춘이 연설함.
▶ 이후 백정들은 근대
교육을 받아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점차 권리를
확대해 나감.
▶ 1910s
진주를 중심으로 백정들은 도살업 종사자들의 권익을 위한 모임을
가짐.
- 1922
일본에서 부라쿠민 차별 철폐 운동이 발생했고, 이는 조선형 평사 설립에
영향이 있었으리라 추정
■ 조선 형평사 설립
▶ 공사립학교에서 백정의 아이를 입학 거부한 일이
발생하자,
▶ 1923.4
진주의 지식인과 경제력을 갖춘 백정들이 주도하여 차별 철폐와 평등 사회 구현을 목표로 조선 형평사를
결성함.
▶ 선전 활동과 언론, 재일사회단체·노동공제회 등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으로 확산함.
□ 반형평 운동과 내부
갈등
▶ 1923.5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렸고, 다음 날 농민들이 진주 형평사를 습격함.
▶ 이후
전국에서 반형평 시위, 백정 폭행 사건, 백정들에게 신분 표시 강요 등
차별이 이어짐.
- 백정은 일제에 의한 민족차별과
조선인들에 의해 사회적 차별을 받음.
▶ 19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평사는 전국에 80개의 조직을 구축하며 성장함.
▶ 1924.2
형평사는 본사 이전과 운동 노선을 두고 ‘서울파(혁신파)’와
‘진주파(보수파)’로 세력이 나뉨.
- 백정 출신을
중심으로 한 ‘서울파’는 사회주의 계급 운동과 연대를 주장했지만,
- 비백정
출신이 중심의 ‘진주파’는 단결을 통한 해방운동을 주장함.
□
사회운동 단체로 성장
▶ 형평사의 분열은 반형평 운동을
계기로 통합을 이루었으며, 본부를 서울로 이전하고 조직을 개편함.
- 이
과정에서 서울파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직업적 활동가와 외부 지식인들이
합류함.
▶ 1925.8
예천청년회장의 차별적 발언을 계기로 형평사원들이 군중에게 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 이후 형평사는 조직을 확대하고 사회운동 단체들의 지지를 받아
전국적인 사회운동 단체로 성장함.
▶ 1927
서울파가 고려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자, 하위단체에 활동하던
젊은 급진세력이 형평사를 주도함.
▶ 1930s
사회주의 세력이 새로운 계급 중심 조직을 만들자는 ‘해소론’을
제기했지만, 형평사는 유지하기로 함.
▶ 1933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으로 급진세력이 몰락하고, 진주파가 다시 지도세력으로 부상함.
↘ 일제가 청년회원들을 공산주의자로 조작한
사건
■ 이후
▶ 1935
형평사는 ‘대동사’로 개칭하고,
▶ 이익단체로 변질되어
일제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변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