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교종 중심 불교 질서의 동요
▶ 10~11C 고려
전기의 불교는 왕실과 문벌귀족의 후원을 받는 교종(경전과 교리 중심)이
불교계의 중심을 이뤘고,
▶ 1097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참선과 깨달음 중심)을 포용하고자
천태종을 개창하였음.
▶ 그러나 고려 후기에 들어
문벌귀족의 권력 독점과 전시과 체제의 동요로 사회적 모순이 심화했고,
불교계 역시 왕실과 귀족의 후원에 의존하면서 점차 세속화되었음.
▶ 무신정변(1170)
이후에는 문벌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일부 교종 사원이
무신정권에 저항하였고, 이에 따라 기존 교종 중심의 불교 질서도
흔들리게 되었음.
■ 정혜결사(수선사 결사)
□ 지눌의 출가와 수행을 통한 깨달음
- 지눌은 8세의 나이로 출가(1165)하여 여러 고승을 찾아다니며 구도의 길을 걸었음.
▶ 1182
승과에 급제한 뒤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당시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고, 뜻을 함께하는 승려들과 정혜결사를
조직하기로 약속하였음.
↘ 결사는 승려와 신도들이 공동의 수행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한 신앙 공동체를 말함.
▶ 이후, 출세의 길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전남
창평의 청원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 1185
경북 예천의 보문사에서는 선종과 교종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음.
□ 정혜결사 개창
▶ 1188 지눌은 경북 영천의 거조사에서 동료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를
시작하였고,
↘ 지눌과 정혜결사의 지도자들은 주로 지방 향리나
유학 지식을 갖춘 지방 지식인층 출신으로, 중앙 문벌귀족 및 권력과
밀착한 기존 불교계를 비판하였음.
▶ 1190년 이어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어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결사의 문을 열었음.
▶ 이후,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세 번째 깨달음을 얻고
간화선을 중요한 수행법으로 받아들였음.
↘ 간화선은 하나의 화두에 집중하며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
□ 돈오점수와 정혜쌍수
▶ 돈오점수는 단번에 깨달은 뒤에도 지속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수행론이며, 정혜쌍수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수행 원칙이자 실천 방법으로,
▶ 지눌은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바탕으로 정혜결사의 핵심
이념과 수행 체계를 마련하였음.
□ 정혜결사의 확장
▶ 1200 정혜결사의 참여자가 늘어나자 지눌은 결사의 근거지를 전남
순천의 길상사로 옮겨 정혜사로 삼았고,
▶ 이후 ‘수선사’라는 이름을 사액받았음.
↓ 수선사는 오늘날의 송광사(사적 제506호)로,
불·법·승을 상징하는 삼보사찰 가운데 많은 고승을 배출한
승보사찰임.
□ 지눌의 입적과 보조국사 추증
▶ 1210 지눌은
선법당에서 대중과 문답한 뒤 법상에 앉은 채 입적하였음.
▶ 이후
지눌은 국사로 추증되어 ‘불일보조’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감로탑이 세워졌음.
↓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은 보조국사
지눌의 사리를 모신 승탑으로,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
■ 이후
□ 무신정권의 지원과 수선사의 성장
▶ 1216 수선사
제2대 사주 혜심은 최우의 천거로 대선사에 임명되면서 무신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 1216
같은 시기 요세는 전남 강진에서 백련사 결사를 이끌었음.
▶ 최우는 두 아들을 혜심의 문하에 출가시키고 수선사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선사는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는 주요 불교 세력으로 성장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