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해방 이후
▶ 1945.8 광복 이후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며 남북 간 왕래와 우편 교류가
제한됨.
▶ 1948 이후
남북에 각각 별도의 정부가 세워졌고, 고향이나 가족이 있는 남이나
북으로 갈 수 없는 이들이 생겨났음.
-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자 북쪽의 자본가와 지주, 종교인 등은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남쪽의 공산주의자들은 북쪽으로 이동함.
□ 6.25 전쟁
▶ 1950.6.22 남북
간의 우편물 교환이 완전히 중단된 가운데,
▶ 1950.6.25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났고,
▶ 1953.7
휴전 이후에도 남북의 대립 속에서 월북·월남자, 납북자, 미송환 포로 등
새로운 이산가족이 계속 생겨났음.
▶ 남북
이산가족뿐만 아니라 전쟁과 피난으로 남한 내에서도 가족과 생이별한
국내 이산가족이 많았으며, 대한적십자사의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계기로
이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받기 시작함.
■ 국내 이산가족 찾기
□ 라디오 방송 시작
▶ 1973.10
대한적십자사는 KBS라디오와 협력해 처음으로 이산가족 명단과 사연을
방송함.
▶ 1974 이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고정 프로그램으로 방송이 본격화되었고,
국민적인 관심을 끌게 됨.
- 국내 이산가족 찾기
신청 526건은 대부분 해방 후나 한국전쟁 중에 헤어진 가족을 찾는
것이었으며, 일부는 일본 징용이나 만주·중국 등지로 간 혈육을 찾는
경우도 있었음.
▶ 1977~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 찾기를 국민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해
사진전시회를 열고, 편지와 수기를 모아 단행본을 발간함.
□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 생방송
▶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 KBS 1TV에서 특별 생방송을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 7.1 예상보다 큰
반응에 방송은 새벽 2시 30분까지 연장함.
▶ 7.1
이른 아침부터 KBS 본관 앞에는 1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모이자
▶ KBS는
연장 방송을 결정하고 ‘이산가족찾기추진본부’를 긴급 설치했으며,
▶ 7.3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종일 생방송을
이어갔음.
▶ KBS와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 명단이 실린 호외를
매일 발행했고, 주요 신문들도 생방송 3일째부터 이를 1면 머리기사로
다루기 시작했음.
▶ ~7.12
총 100,952건의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가 접수됨.
▶ 1983년 11월 14일 새벽 4시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 프로그램은 약 453시간 45분의 기록적
장기 생방송 끝에 종료되었고, 최종적으로 10,957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에 성공함.
■ 이후
▶ 이
방송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받으며 남북 분단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림.
▶ 1985
첫
남북 이산가족 만남이 이루어짐.
▶ 2015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 공통의 역사로 인정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