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위안부 강제 동원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일본군 강제 위안부, the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일본군은 중일 전쟁 이후 조선·중국 등 점령지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본격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함.
해방 후 피해 여성들은 사회적 낙인과 편견으로 오랜 기간 고통받았고, 대부분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음.
1990년대 이후 피해 여성의 증언과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지속되고 있음.


‘정신대’는 일제가 어린 여성들을 강제 동원해 군수공장에서 노동시키던 조직이고,
‘종군 위안부’는 피해 여성들이 군대를 따라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을 의미함.

■ 일본군 위안부 운영
 - 일본군은 병사의 성욕 해소, 성병 예방, 강간 방지와 함께 현지 민심 악화를 막기 위해 군 위안소를 설치했고, 이 시설은 일본군과 군속(군 관련 민간인)이 직접 설치하고 관리함.

 ▶ 1932 만주사변(1931) 이후 상하이에 처음 위안소가 설치됨.
 ▶ 1937 중일 전쟁 발발 후 본격적으로 위안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일본군의 점령지가 확대될수록 위안소도 같이 증가함. 
 ▶ 1939 허가받은 민간인도 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함.

 ▶ 1941.12 일본은 남방 작전을 전개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며 점령지마다 위안소 설치도 확대함.
 ▶ 1943년 후반 전쟁 장기화로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지며 일본군이 위안소 운영을 직접 통제함.

 - 위안소가 있었던 군 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지만, 증언과 자료를 통해 위안소가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퍼졌음을 알 수 있음.
 - 일본, 조선, 중국, 필리핀 등 점령지 여성들을 동원했으며, 전체 피해자 수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으로 추정함.

■ 일본군 위안부
□ 동원 과정
 ▶ 일본군은 직접 위안부를 모집하지 않고, 광고나 취업 사기 등 민간을 통해 위안부를 동원함.
 - 군인이나 경찰이 직접 나선 경우에는 폭력·납치·인신매매 등의 방식이 많았고, 전쟁 말기로 갈수록 이런 강제 동원이 더 심해짐. 

 ▶ 동원된 위안부는 일본군의 감시 아래 강제로 이동되었고, 이 과정에서 폭행과 성폭력을 당함.
 -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여성들의 출입국과 이동을 돕는 방식으로 이러한 강제 동원에 협조함.

□ 위안소 생활
 ▶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들은 일본군의 통제 아래 반복적인 성폭력을 당하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이는 고문, 학대, 자살로 이어짐.
 - 위안소 관리자는 돈을 벌 수 있다는 회유와 외부에 대한 공포를 조장해 여성들의 탈출을 막음.

 ▶ 일본군은 위안소 규정을 통해 통제를 시도했지만, 현장에서는 위생과 안전이 무시되어 여성들은 성병에 노출되고 반복된 임신과 출산을 겪어야 했음. 
 - 이들은 고향에 연락조차 하지 못한 채 생활했으며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전쟁 중에 사망하기도 함.
 - 또한, 위안소 규정상 여성들은 비용을 지불받게 되어 있었지만, 업자들이 이를 착취해 실제로 거의 보수를 받지 못함.

■ 해방 이후
 ▶ 1945.8 일제가 패망하며 일본군 위안소는 해체되거나 폐쇄됨.
 ▶ 일부 여성은 일본 군인이나 업주에 의해 귀국했지만, 대부분은 버려진 채 스스로 돌아오거나 미군 수용소를 거쳐 귀환했음.
 - 많은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외면, 과거의 상처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거나 정착 후에도 안정된 삶을 살기 어려웠음.

□ 위안부 문제 공개
 -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과 낙인, 가족의 외면 등으로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지 못하고 수십 년간 침묵함.

 ▶ 1988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조사를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가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함.
 ▶ 1990 여성단체들이 일본 정부에 진상규명과 사죄를 요구하며 ‘정대협’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운동에 나섬.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정의기억재단‘과 통합되어 2018년 7월 ’정의기억연대‘로 이어짐.

 ▶ 1991 김학순 할머님의 공개 증언 이후 전 세계 생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 1992.1 일본 총리 방한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이어짐.
 ↘ 수요시위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고 있음.
 ▶ 2007 미국 하원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역사 교과서 기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함.
 ↘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공식 인정과 사과, 책임 수용, 역사 교육 강화를 촉구
 ▶ 2011.12 수요시위 1,000회를 맞아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국내외로 소녀상 건립이 확산됨.

 ▶ 2015.12 한일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으나 피해자와 시민사회 반발로 사실상 무효화됨.
 ▶ 현재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운동이 지속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