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 위안부 운영
- 일본군은 병사의 성욕 해소, 성병 예방, 강간
방지와 함께 현지 민심 악화를 막기 위해 군 위안소를 설치했고, 이
시설은 일본군과 군속(군 관련 민간인)이 직접 설치하고 관리함.
▶ 1932
만주사변(1931) 이후 상하이에 처음 위안소가
설치됨.
▶ 1937
중일 전쟁 발발 후 본격적으로 위안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일본군의 점령지가
확대될수록 위안소도 같이 증가함.
▶ 1939 허가받은
민간인도 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함.
▶ 1941.12
일본은 남방 작전을 전개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며 점령지마다 위안소
설치도 확대함.
▶ 1943년 후반
전쟁 장기화로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지며 일본군이 위안소 운영을 직접
통제함.
- 위안소가 있었던 군 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지만, 증언과 자료를 통해 위안소가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퍼졌음을 알 수 있음.
- 일본,
조선, 중국, 필리핀 등 점령지 여성들을 동원했으며, 전체 피해자 수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으로 추정함.
■ 일본군 위안부
□ 동원 과정
▶ 일본군은 직접 위안부를 모집하지 않고, 광고나
취업 사기 등 민간을 통해 위안부를 동원함.
- 군인이나 경찰이 직접 나선 경우에는 폭력·납치·인신매매 등의
방식이 많았고, 전쟁 말기로 갈수록 이런 강제 동원이 더
심해짐.
▶ 동원된 위안부는 일본군의 감시 아래 강제로
이동되었고, 이 과정에서 폭행과 성폭력을 당함.
-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여성들의 출입국과 이동을 돕는 방식으로 이러한
강제 동원에 협조함.
□ 위안소 생활
▶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들은 일본군의 통제 아래
반복적인 성폭력을 당하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이는
고문, 학대, 자살로 이어짐.
- 위안소 관리자는
돈을 벌 수 있다는 회유와 외부에 대한 공포를 조장해 여성들의 탈출을
막음.
▶ 일본군은 위안소 규정을 통해 통제를 시도했지만, 현장에서는
위생과 안전이 무시되어 여성들은 성병에 노출되고 반복된 임신과
출산을 겪어야 했음.
- 이들은 고향에 연락조차 하지 못한 채
생활했으며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전쟁 중에 사망하기도 함.
- 또한,
위안소 규정상 여성들은 비용을 지불받게 되어 있었지만, 업자들이 이를
착취해 실제로 거의 보수를 받지 못함.
■ 해방 이후
▶ 1945.8 일제가
패망하며 일본군 위안소는 해체되거나 폐쇄됨.
▶ 일부
여성은 일본 군인이나 업주에 의해 귀국했지만, 대부분은 버려진 채
스스로 돌아오거나 미군 수용소를 거쳐 귀환했음.
- 많은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 가족의 외면, 과거의 상처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거나 정착 후에도 안정된 삶을 살기 어려웠음.
□ 위안부 문제 공개
-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과 낙인,
가족의 외면 등으로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지 못하고 수십 년간
침묵함.
▶ 1988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조사를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가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함.
▶ 1990
여성단체들이 일본 정부에 진상규명과 사죄를 요구하며 ‘정대협’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운동에 나섬.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정의기억재단‘과
통합되어 2018년 7월 ’정의기억연대‘로 이어짐.
▶ 1991 김학순 할머님의 공개 증언 이후 전 세계 생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 1992.1 일본 총리
방한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이어짐.
↘ 수요시위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고
있음.
▶ 2007 미국
하원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역사 교과서 기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함.
↘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공식 인정과 사과,
책임 수용, 역사 교육 강화를 촉구
▶ 2011.12 수요시위 1,000회를 맞아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국내외로 소녀상 건립이 확산됨.
▶ 2015.12
한일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으나 피해자와 시민사회 반발로
사실상 무효화됨.
▶ 현재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운동이 지속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