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94%가 농업에 종사했음(1930년 기준).
- 암태도
대지주인 문재철은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부를 축적했고,
- 일제가 쌀을 저가에 구매하자, 소작인들에게 높은 소작료를
부과하여 손해를 메꿈(산미증식계획).
↘ 당시 일본은 산업화로 인해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쌀 수요도 증가함.
- 1923.1
순천에서 소작료 4할 요구가 관철됨.
■ 암태도 소작쟁의
▶ 1923.12
서태석(39) 주도로 암태소작인회가 결성되고,
- 논밭 소작료 인하, 비협조 지주에 대한 소작료 거부 및 파작
등을 결의함.
▶ 대부분의 지주가 소작료 4할 요구를
수용했지만, 최대 지주인 문재철은 이를 거부함.
▶ 1924.3.21
이에 소작인회는 불납동맹을 시작하고,
↘ 불납동맹은 부당한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농민들의 연대 운동
▶ 3.27 면민대회를
거치며 ‘소작료 4할’ 요구는 주민 전체의 문제로 확대됨.
▶ 송덕비
문제로 문재철 측과 소작인회 간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남.
↘ 송덕비는 주로 지역 사회에 큰 공헌을 했거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인물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
▶ 이는 양측의 고소로 이어지고, 식민 권력이
개입하여 소작인회 간부 13명을 구속함.
▶ 5.11
이에 소작인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불납동맹 지속과 위기 발생 시 공동
대응을 결의함.
▶ 6.3
소작인회는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 6.4~
목포 경찰서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앞에서 석방 시위를 진행함.
▶ 6.7
식량 부족과 당국의 설득으로 시위를 중단하고, 예심판사의 약속을 받아
암태도로 귀환함.
□ 아사동맹
▶ 7.3
하지만 13명이 석방되지 않고 공판에 회부되자, 암태면민들은 다시
단식농성을 결의하고,
▶ 7.8 500여 명이 목포지청 앞에서 ‘아사동맹’에 돌입함.
▶ 이러한 투쟁이 전국적 반향을 일으켜 각지에서
후원과 연대가 이어지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 7.15
일제는 저항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직접 개입하여 타협안을 추진함.
▶ 8.30 경찰서장의 중재 하에 문재철과 소작인회 대표 간 화해조서가
체결되며 암태면민들의 승리로 끝남.
- 소작료 4할 및 농업장려금 1할 책정, 소작회
운영 및 지주 참여, 미납 소작료 분할 납부 등을 합의
■ 이후
▶ 9.18
암태도 소작쟁의 주도자들은 소요죄 및 상해죄로 실형 및 집행유예가
선고됨.
▶ 1924~ 인근
섬 지역 소작쟁의에도 영향을 미침.
▶ 이러한
소작쟁의는 암태도 이후 급감하다 30년대까지 꾸준히 증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