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천주교 수용
 - 17C
            조선 사신들이 베이징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유럽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천주교와 서양 문물에 대한 지식을 접함
 → 18C
            남인 실학자들에 의해 천주교가 학문적 대상으로 인식됨
 → 1791 신해박해 - 천주교도 윤지충은 어머니의 상을 전통 상례 방식대로
            치르지 않아 처형됨
 - 집권층은 천주교가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라 인식
 - 정조는 ‘정학’을
            밝힘으로써 ‘사학’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
          
            ■ 신유박해
 - 1800
            순조 11세에 즉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작
 → 1801 정순왕후는 ‘사학’에 대한 토벌을 공식적으로 지시 
 →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등
            남인 인물들을 포함한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
          
            ■ 정치적 측면(남인과 노론의 대립)
 → 정조대
 - 남인
            세력은 사도세자 문제에서 정조의 입장을 지지하고, 서학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이며 개혁 정치를 시행
 - 노론 벽파는
            개혁정책에 반대
 → 순조대 - 정순왕후는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
 → 신유박해를
            거치며
 - 남인 계열 인물들은 천주교를 믿지 않았어도 유배·관직 박탈에
              처해짐 - 채제공,
            정약용,
            정약전 등
 - 남인
            계열 주도로 이룩된 개혁은 대부분 폐기됨
          
            ■ 종교적 측면
 - 천주교인들은 조상 제사 거부,
            신분 질서 무시 등으로 조정은 인륜과 체제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는 무리로
              인식 
 - 서양 선박을 불러오려는 시도는 나라를 외국에
            바치려는 음모로 인식
          
■ 이후, 천주교도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하여 교세를 확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