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신라는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대에 삼국 통일
전쟁을 치르며 왕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왕권에 저항하던 진골 귀족들을
숙청하며 강력한 왕권 체제를 확립함.
▶ 665
문무왕과 자의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신문왕이 태자에 책봉됨.
■ 재위 기간
▶ 681년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신문왕이 즉위함.
□ 김흠돌의 난 진압
▶ 681 삼국 통일
전쟁의 공신이자 왕의 장인이었던 김흠돌을 중심으로 유력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음.
▶ 이후 신문왕은 시위군(왕의 친위·근위 부대)을 강화하고,
반란에 가담하거나 연루된 진골 귀족들을 처벌하며 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철저히 숙청함.
▶ 682
문무왕의 뜻을 이어 감은사( 경주 감은사지 , 사적 제31호)를 완공함.
□ 국학 설치
▶ 682.6 국학을 설치해 유교 교육을 통해 왕권 강화의 이념을 확립하고
행정 실무를 담당할 관인을 양성하였음.
▶ 685 이후 각
관부의 행정 실무를 맡는 사지직을 새로 설치하여 증가한 행정 업무에
대응하였으며, 그 결과 신라 중앙 관부는 영·경·대사·사지·사의로 구성된
5등 관제의 관료 체계를 갖춤.
□ 중앙 관제 정비
▶ 682~688 위화부령
설치를 시작으로 공장부감·채전감·예작부경 증설, 음성서 장관의 격상과
선부경 증치에 이르기까지 중앙 관제를 단계적으로 정비하였음.
□ 지방 통치 제도(9주 5소경) 완성
▶ 685.3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을 설치함으로써 5소경 체제를 완성하여 확장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지방 통치 제도를 확립함.
↘ 5소경 : 국원소경·북원소경(고구려 지역),
금관소경(가야 지역), 서원소경·남원소경(백제 지역)
▶ 685
완산주(지금의 전북 전주시)와 청주(지금의 경남 진주시)를 설치해 통일된 영토를 삼국별로 3주씩 나눈 9주 체제를 완성한
뒤,
▶ 군·현의 신설과 조정을 통해 전국을 주·군·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지방 행정 체제로 정비함.
□ 군사제도(9서당 10정)
- 군사 제도는 중앙군인 9서당과 지방군인 10정을
중심으로 정비함.
- 9서당은 신라·가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 말갈 등으로 구성된 통합 군대로 삼국 통합과 왕권
강화를 상징하며,
↘ 9서당은 693년 효소왕 대 완성됨.
- 10정은 9주에 배치된 지방 군단으로
한주(漢州)에만 두 개의 정을 두었음.
□ 전지 지급과 녹읍 폐지
▶ 687.5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여 관리가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는 관료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 관료전은 농지를 지급하여 그 농지에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으로 봄.
▶ 689.1 녹읍을 폐지하고 조(세금으로 거둔 곡물)를
지급함.
↘ 경제력과 사적 동원 기반이었던 녹읍을
제거함으로써 진골 귀족의 권한과 세력을 약화하려는 조치
□ 달구벌 천도 시도
▶ 689 신문왕은
달구벌(지금의 대구광역시) 천도를 추진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는데,
- 이는
골품제 아래에서 핵심 관직을 독점하던 경주 기반의 진골귀족 세력의
반대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음.
■ 이후
▶ 692년 7월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효소왕이 즉위함.
▶ 1969
경주 신문왕릉 이
사적 제181호로 지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