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신라 31대 신문왕

김정명, 30대 문무왕의 장남, 32대 효소왕의 아버지
681부터 692년까지 약 12년 동안 왕위에 있었음.

신문왕은 즉위 직후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며 왕권을 한층 강화하였고,
이후 국학을 설치하고 중앙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지방 통치 제도와 군사 제도를 체계적으로 개편하여 통일 이후 국가 운영 체계를 제도적으로 확립하였음.
또한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함으로써 진골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킴.

신문왕

■ 즉위 이전
 - 신라는 태종무열왕문무왕 대에 삼국 통일 전쟁을 치르며 왕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왕권에 저항하던 진골 귀족들을 숙청하며 강력한 왕권 체제를 확립함.

 ▶ 665 문무왕과 자의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신문왕이 태자에 책봉됨.

■ 재위 기간
 ▶ 681년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신문왕이 즉위함.

□ 김흠돌의 난 진압
 ▶ 681 삼국 통일 전쟁의 공신이자 왕의 장인이었던 김흠돌을 중심으로 유력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음.
 ▶ 이후 신문왕은 시위군(왕의 친위·근위 부대)을 강화하고, 반란에 가담하거나 연루된 진골 귀족들을 처벌하며 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철저히 숙청함. 

 ▶ 682 문무왕의 뜻을 이어 감은사( 경주 감은사지 , 사적 제31호)를 완공함.

□ 국학 설치
 ▶ 682.6 국학을 설치해 유교 교육을 통해 왕권 강화의 이념을 확립하고 행정 실무를 담당할 관인을 양성하였음. 
 ▶ 685 이후 각 관부의 행정 실무를 맡는 사지직을 새로 설치하여 증가한 행정 업무에 대응하였으며, 그 결과 신라 중앙 관부는 영·경·대사·사지·사의로 구성된 5등 관제의 관료 체계를 갖춤.

□ 중앙 관제 정비
 ▶ 682~688 위화부령 설치를 시작으로 공장부감·채전감·예작부경 증설, 음성서 장관의 격상과 선부경 증치에 이르기까지 중앙 관제를 단계적으로 정비하였음.

□ 지방 통치 제도(9주 5소경) 완성
 ▶ 685.3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을 설치함으로써 5소경 체제를 완성하여 확장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지방 통치 제도를 확립함. 
 ↘ 5소경 : 국원소경·북원소경(고구려 지역), 금관소경(가야 지역), 서원소경·남원소경(백제 지역)

 ▶ 685 완산주(지금의 전북 전주시)와 청주(지금의 경남 진주시)를 설치해 통일된 영토를 삼국별로 3주씩 나눈 9주 체제를 완성한 뒤, 
 ▶ 군·현의 신설과 조정을 통해 전국을 주·군·현으로 이어지는 3단계 지방 행정 체제로 정비함.

□ 군사제도(9서당 10정)
 - 군사 제도는 중앙군인 9서당과 지방군인 10정을 중심으로 정비함.
 - 9서당은 신라·가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 말갈 등으로 구성된 통합 군대로 삼국 통합과 왕권 강화를 상징하며,
 ↘ 9서당은 693년 효소왕 대 완성됨.
 - 10정은 9주에 배치된 지방 군단으로 한주(漢州)에만 두 개의 정을 두었음.

□ 전지 지급과 녹읍 폐지
 ▶ 687.5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여 관리가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는 관료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 관료전은 농지를 지급하여 그 농지에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으로 봄.
 ▶ 689.1 녹읍을 폐지하고 조(세금으로 거둔 곡물)를 지급함. 
 ↘ 경제력과 사적 동원 기반이었던 녹읍을 제거함으로써 진골 귀족의 권한과 세력을 약화하려는 조치

□ 달구벌 천도 시도
 ▶ 689 신문왕은 달구벌(지금의 대구광역시) 천도를 추진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는데,
 - 이는 골품제 아래에서 핵심 관직을 독점하던 경주 기반의 진골귀족 세력의 반대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음.

■ 이후
 ▶ 692년 7월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효소왕이 즉위함.

 ▶ 1969  경주 신문왕릉 이 사적 제181호로 지정됨.




# 참고 자료
[신문왕]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