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05 을사늑약 이후,
의병·애국지사·조선 농민들이 만주로 이동하여 간도에 거주지를
형성함.
▶ 1906
이상설(36)이 간도에 서전의숙(민족학교)을 창립하고, 이후 간도 지역에
여러 학교가 설립됨.
- 이러한 교육 활동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고 반일 투쟁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
- ~1916.12
간도에 161개의 학교가 설립됨.
▶ 1909
일제는 간도 협약을
통해 간도 지역에서 영사 재판권을 획득하고 경찰서를 설치함.
↘ 간도는 조·중·러 3국의 접경지대로
군사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일본은 이를 만주 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려 함.
▶ 1910 경술국치
이후, 의병·애국지사·조선 농민들이 간도 조선인 거주지로 이동함.
▶ 1919 3.1 운동
▶ 3.13 간도 지역
조선인들은 용정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를 전개했지만(3.13 시위),
-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후 시위는 간도와 만주 각지로
확산함.
▶ 3.13 시위를 계기로 간도 지역의 반일 단체들은 무장 부대를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함.
▶ 1920년 봄
일제는 만주 군벌과 결탁하여 독립군 근거지를 공격하고 조선인을
학살함.
■ 봉오동 전투
▶ 5.11 독립군
부대가 봉오동에 집결하여 최명록과 홍범도의 지휘 아래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함.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군정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광복단, 의군단, 안무의 국민회 등
▶ 6.4 삼툰자
전투 - 대한신민단 소대가 일본군 국경 보초소를 습격
▶ 6.4 저녁
일본 남양 수비대 중대 병력을 삼툰자에서 매복하여 습격
▶ 6.6
후안산 전투 - 독립군이 일본군 19사단 대대에 반격하여
120여 명 섬멸
▶ 6.7
봉오골 전투 - 일군을 포위 공격하여 섬멸
▶ 6.8
독립군 연합이 산악 지역으로 이동하며 전투 종료됨.
↘ 6월 4일 대한 신민단 소대에 패배한 일본군이 6일
봉오동을 습격함.
▶ 독립군의 승리 소식은 ‘독립신문’ 등을 통하여 국내외로
전파되어 독립운동의 사기를 북돋움.
↘ 임시정부가 1919년 8월부터 발행한
‘독립신문’으로,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다름.
- 독립군 연합은 230여 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150여 명을 섬멸하고 무기를 노획함.
▶ 1920.7
일제는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봉천 군벌과 비밀리에
결탁했지만,
- 독립군은 연길 지역의 중국군과
순경들에게 정보를 받아 안도, 화룡 방면으로 이동함.
■ 이후
▶ 1920.8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조선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우고,
▶ 1920.10
의도적으로 훈춘사건을
일으켜 간도 지역에 정규군을 출병하여
간도 참변을 일으킴.
▶ 1920.10
독립군들이 밀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청산리 대첩이
일어남.
▶ 1920년대 중반
국민회, 북로군정서,
광복단, 의군단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형성되어 무장 투쟁을 전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