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과 임시정부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되었지만,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됨.
이후, 민족단일당 건설론이 확산하는 계기가 됨.

■ 배경
 ▶ 1910 경술국치 
 ▶ 1919.2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 1919 3.1 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 등의 단체들이 조직됨.
 - 1919.3 대한국민의회는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 1919.4 상하이 임시정부와 한성정부는 ‘정부’의 형태를 표방하며 외교 독립을 주요 운동 노선으로 삼음.
 ↘ 실질적으로 ‘정부’의 요건을 갖추진 못했지만, 국제사회에서 한국 독립을 알리고 외교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정부’라는 명칭을 사용

□ 단체들의 통합
 ▶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내각 구성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 최고 지도자의 직책을 ‘대통령’으로 개편하며 통합을 이루어, 법통을 계승하고 정통성을 확립함.

 ▶ 그러나 대한국민의회는 임시의정원의 해체와 무장투쟁론이 반영된 신국회 구성을 통합 조건으로 내세움.
 - 1919.9 결국, 이동휘 등 일부 한인사회당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부분적 임시정부 통합을 이룸. 

□ 인사들의 분열
 -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알려지면서 임시정부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고,
 - 1920.12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 후에도 불신은 계속되었음.
 - 1921.2~5 김규식, 남형우, 안창호 등 주요 인사가 임시정부를 탈퇴했으며,
 - 이동휘 계열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당원들도 임시정부를 탈퇴함.
 ▶ 결국 임정은 부분적 통일전선체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명목상의 독립운동 단체로 전락함.

■ 국민대표회의
□ 개최 준비
 ▶ 1921.1~ 국민대표회의는 한인 독립운동 단체를 총망라하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준비되었으며, 
 - 대한국민의회, 북경 군사통일회의, 한인사회당 계열 등 반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했음.
 - 안창호도 임시정부는 절대적인 조직이 아니라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으며,
 ▶ 1921.8 상해·북경·천진 지역의 인사들도 포함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주비회)'가 출범함.

□ 개최 지연
 - 협성회가 주비회 참가자들을 위협하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방해했고,
 ↘ 협성회는 임시정부 내 이승만 지지세력인 기호파 인사들이 조직한 단체
 - 임시정부가 워싱턴 회의 공동 준비를 요구하자, 주비회는 국민대표회 준비를 유예함.
 ↘ 워싱턴회의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함
 - 주비회는 재정난을 겪었으나,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활동을 본격화함.

□ 국민대표회의 개최
 ▶ 1923.1~6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 개최 
 - 125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조파와 창조파 간의 대립 속에서 총 74회의 회의가 진행됨.
 -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며, 개혁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입장.
 - 창조파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더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장.

 ▶ 1923.5 개조파와 창조파는 여러 안건을 논의했지만, 임시정부 존폐 문제로 대립하여 개조파가 탈퇴함. 
 ▶ 창조파는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했지만, 이듬해 1월 코민테른의 지원 중단으로 해산됨.

■ 이후
 ▶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실패했으나,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민족단일당 건설론이 확산됨.
 ▶ 1923.6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내각책임제)로 전환함.
 ↘ 여러 명의 국무위원이 합의하여 운영하는 집단지도 체제로 변환




# 참고 자료
[국민대표회]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