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1575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로 출생
 - 선조와
            의인왕후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13명의 왕자를 두었지만
            세자를 정하지 못함
 → 1592.4 임진왜란 발발 -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고 피난길에 오름
 → 조선
            조정은 피난 중 분조를 실행하고, 이에 광해군은 한양 이북 지역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 
 → 평양 전투 이후, 명이 일본과 강화 협상을
            진행하자 조선 조정은 이에 반대함
 → 1593
            명이 왕위 교체론으로 선조를 압박하자, 선조는 광해군에게 15차례
            양위를 권유.
 → 1606
            정비 인목왕후가 첫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자 신료들 사이에서 광해군
            견제 세력 형성
 → 1608
            선조 승하
          
            ■ 즉위 이후
 → 1608
            즉위 - 정국은 대북파가 주도했지만, 당파와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
 → 1608 경기도 지역 대동법을 실시로 농민 생활 안정과 국가 재정
              확충을 도모 
 → 1609
            기유약조 - 일본과 국교 체결
 → 1610
            회퇴변척이 발생하며 붕당 간 갈등 발생
 → 1612
            순화군의 장인이 역모를 꾸민다는 진술로 인해 서인과 남인이 처벌을
            받음
 → 1613 계축옥사로 서인과 남인이 실각하며 정국은 대북파가
              주도 - 인목대비 유패, 영창대군 처형 
 → 1613
            동의보감을 목활자로 간행
 → 1618
            후금의 공격으로,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하지만 광해군은
            거절 → 결국 강홍립과 1만 군사를 파견
 - 쇠퇴하는 명과 강성해진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 외교를
              펼치지만, 서인은 반발
 → 1619
            강홍립과 조선군은 심하전투에 참가하지만, 명군이 전멸하여 후금에
            투항.
 → 1623 인조반정 - 서인이 폐모살제와 과도한 토목공사, 명을 배신한 군주라는
            명분으로 반정을 주도
 → 1641
            죄인이 된 광해군은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 눈을 감음
          
            ■ 토목공사
 - 선조 대부터 진행한 창덕궁 중건과
            광해군이 지시한 창경궁 중수·인경궁 건설·경덕군(경희궁) 건설로 인해,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 증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