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7~18C
상품화폐 경제 발달 등으로 농민층이 분해되며, 영세 소농민·유민층이
발생
→ 1798
홍경래는 과거 시험에 낙방하며, 세도 정권의 극심한 수탈과 서북지방
차별에 불만을 품음
→ 평안북도 가산군에
기지를 정하고 부대·지휘부·도시에 조직을 결성
- 벼슬을
지냈던 가문, 부유층이 지도부에 합류
→ 1800 순조 즉위
→ 1809, 1810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 발생과 흉년으로 유랑민이 급증
→ 1811
(황해도) 곡산 민란
■ 홍경래의 난
→ 1811.12.18 세도 정권 타도를 목표로, 다복동에서 500여 명이 모여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눠 출병함
→ 12.18
남진군은 가산군, 북진군은 곽산군을 점령
→ 12.19
남진군은 박천군을 점령하고 북진군은 정주성에 입성
→ 남진군
내부에서 다음 공격지점을 두고 이견이 발생하며 분란이 발생
→ 12.23
정부의 대응이 시작
→ 12.24
남진군은 송림에 도착하여 안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북진군은 선천을
함락시킴
→ 12.25
남진군은 태천성 접수
→ 12.28
남진군은 송림에 진을 치고, 북진군은 1부대와 2부대로 나뉨
→ 북진군
1부대는 철산을 장악하지만, 회군천 전투에서 의병장·관군에 패하며
용천에 주둔
→ 북진군 2부대는 구성군 점령에
실패하고, 정주성으로 합류
→ 반란군은 안주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정주성으로
퇴각, 백성들은 반란군에게 의지 - 청천강 이북 8개 지역
점령
→ 1812.3
반란군은 공세를 펼치지만, 의병장·관군에 의해 피해를 봄
→ 3월
말 반란군의 식량이 부족해짐
→ 4.3~18 밤 관군은 정주성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화약으로 성을
무너뜨리고, 입성하여 반군을 제압
- 홍경래는 사망하고 지도부는 사망하거나 생포됨
■ 이후 농민 봉기 발생에 영향을 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