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46.3~5
1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 1946.6.3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 언급(단정론)
-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은 반대하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도 지지하지
않음
→ 미군정은 중도 좌파 여운형과 중도 우파
김규식에게 좌우 합작을 제안
■ 좌우 합작 위원회
→ 7.25 하나의 임시 정부 수립을 목표로 좌우 합작 위원회
발족
→ 좌익 인사들은 합작에 회의적이었고, 여운형은
이를 설득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을 설득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함
→ 1946.10.7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 통일 임시 정부 수립, 유상 매입과 무상 분배
원칙하에 토지 개혁, 반민족 행위자 처벌 등
→ 우익은
친일 반민족 행위 처벌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좌익은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과 친일파 즉각 청산을 요구하며 반대
→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하고, 좌우 합작 위원회 지원을 점차 축소함
- 의원의
과반수는 선거를 통해 선출했으며, 좌익세력의 참여 거부로 우익세력이
다수 당선됨
→ 1947.3~7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 (트루먼 독트린, 봉쇄 정책 등으로 공산주의 팽창을 억제)로 좌우 합작
운동은 지원을 받지 못함
→ 1947.5~10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결렬되며, 남북 통일 정부 수립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짐
→ 1947.7 여운형이 암살되며 좌우 합작 운동은 사실상 중단
→ 1947.12
좌우 합작 위원회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