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 이전
→ 8C 말
신라 중앙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발생하며, 지방 호족 세력이 성장하여
조정을 이탈
→ 879
용건(왕윤)과 위숙왕후 한씨 사이에서 출생
→ 896
궁예가 강원도 일대를 점령하자, 송악의 왕융은 궁예에게 귀부하고 왕건은 성주에 임명되어 궁예 조정이 들어감
→ 900 왕건은
경기 남부와 충청 북부 공략하여 성과를 거둠
→ 900
견훤이 후백제 건국
→ 901
궁예가 후고구려 건국
→ 광주·청주·당성 등의 군현을 공략하여 성과를
거둠
→ 903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후방인 금성군(현 나주)을 공략하여
군사적 거점을 만듦
→ 913
왕건은 최고 관직인 시중의 자리에 오름
→ 918.6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폭정을 펼치자, 왕건과 지지 세력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움
■ 건국 이후
→ 918.8
후백제에서 고려에 축하 사신을 보냄
→ 919
송악 천도
→ 920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고 고려가 구원에 나서자, 후백제는 고려를
적대시함
→ 927
후백제의 공격으로 신라 서라벌이 함락되고, 왕건이 지원에 나서지만
대패함
→ 929.12~930.1 고창 전투
- 왕건은 고창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여, 현지
호족의 도움을 받아 후백제에 대승을 거둠
- 이후,
경상도 북부·동해안 일대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함
→ 935
신라가 고려에 항복
→ 936
후백제의 권력 승계 문제로 견훤은 유패되어 고려에 투항하고, 후백제
공략을 요청
→ 936.6
왕건의 아들 왕무(2. 혜종)가 선봉으로 출병
→ 936.9 왕건은 본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완산주를 점령하여 후삼국을 통일함
→ 943
승하
■ 왕건의 정책
□ 북진 정책 - 고구려를 계승하며, 영토를 넓힘
□ 민족 통합 정책 - 신라, 후백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임
□ 호족 회유 정책
- 혼인 정책: 여러 호족의 딸과 결혼
- 사성 정책: 호족에게 왕씨 성을 하사
□ 호족 견제 정책
- 기인제도: 호족의 자제를 수도(개경)에 머물게
함
- 사심관 제도: 호족이나 공신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을 다스리게 함
□ 흑창 설치 - 곡식을 빌려줌
□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국가 행사를 중시
□ 유학자 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