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C 국내외 상황
- 1616
후금 건국
→ 1618
명은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에 원병 요청하지만, 광해군은
중립외교(실리외교)를 실시
→ 1623
인조반정 - 서인과 남인이 연대하여 인조를 옹립하고
친명배금 정책(명분외교)을 시행
→ 1627
정묘호란 -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음
→ 1636
청은 국상 조문을 위해 방문하여 군신 관계를 요구하지만, 조선은 이를
거부
→ 1636.4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청으로 변경
■ 병자호란
- 1636.12.1
청은 조선이 군신 관계를 거부하자, 명을 공격하기에 앞서 명의 동맹국인 조선을 공격
→ 12.14 조선
조정은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소식에 강화도로 파천 결정
→ 원손,
둘째 아들(효종) 등은 강화도로
이동하지만, 인조 일행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이동
→ 12.16
청 선봉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하고 이어 주력군도 도착
→ 조선 조정은 40여 일간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항전
- 관군, 의병, 승병, 명의 원군이 남한산성을
지원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
- 고립 초기엔
척화주전파 김상헌 등이 우세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화파 최명길 등이
우세
→ 1.20 청
태종은 항복을 요구
→ 1.22
청군은 강화도를 습격하여 왕족들을 포로로
잡음 → 인조는 항복을 결심
■ 항복 조약
- 조선과 청은 군신 관계를 맺음 (정묘호란 땐 형제 관계)
- 명과 외교 단절
-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원군을 파견
- 청에 조공을 바침
- 왕의
장자(소현세자)·차자(봉림대군)와 대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냄
■ 삼전도의 굴욕
- 1.30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례(삼배구고두)를 행함
■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 병자호란 중 다양한
계층의 조선인들이 청에 포로로 끌려가서 이를 데려오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야 했음
-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삼전도비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