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광해군 - 조선 15대 국왕

14. 선조의 아들, 16. 인조의 삼촌
재위 1608~1623

◆ 세줄 요약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되어 전란 중 민심 수습과 의병 모집을 수행함.
즉위 후 대동법을 시행하고 실리적 외교를 펼쳤으나, 계축옥사와 붕당 간 갈등으로 인해 정치적 어려움을 겪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유배지를 전전하다 눈을 감음.

■ 즉위 이전
 → 1575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로 출생
 - 선조와 의인왕후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13명의 왕자를 두었지만 세자를 정하지 못함
 → 1592.4 임진왜란 발발 -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고 피난길에 오름
 → 조선 조정은 피난 중 분조를 실행하고, 이에 광해군은 한양 이북 지역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 
 → 평양 전투 이후, 명이 일본과 강화 협상을 진행하자 조선 조정은 이에 반대함
 → 1593 명이 왕위 교체론으로 선조를 압박하자, 선조는 광해군에게 15차례 양위를 권유.
 → 1606 정비 인목왕후가 첫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자 신료들 사이에서 광해군 견제 세력 형성
 → 1608 선조 승하

■ 즉위 이후
 → 1608 즉위 - 정국은 대북파가 주도했지만, 당파와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
 → 1608 경기도 지역 대동법을 실시로 농민 생활 안정과 국가 재정 확충을 도모 
 → 1609 기유약조 - 일본과 국교 체결
 → 1610 회퇴변척이 발생하며 붕당 간 갈등 발생
 → 1612 순화군의 장인이 역모를 꾸민다는 진술로 인해 서인과 남인이 처벌을 받음
 → 1613 계축옥사로 서인과 남인이 실각하며 정국은 대북파가 주도 - 인목대비 유패, 영창대군 처형 
 → 1613 동의보감을 목활자로 간행
 → 1618 후금의 공격으로,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하지만 광해군은 거절 → 결국 강홍립과 1만 군사를 파견
 - 쇠퇴하는 명과 강성해진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 외교를 펼치지만, 서인은 반발
 → 1619 강홍립과 조선군은 심하전투에 참가하지만, 명군이 전멸하여 후금에 투항.
 → 1623 인조반정 - 서인이 폐모살제와 과도한 토목공사, 명을 배신한 군주라는 명분으로 반정을 주도
 → 1641 죄인이 된 광해군은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 눈을 감음

■ 토목공사
 - 선조 대부터 진행한 창덕궁 중건과 광해군이 지시한 창경궁 중수·인경궁 건설·경덕군(경희궁) 건설로 인해,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 증가



# 참고 자료
중학교 역사2, 금성출판사 2023
중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고등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광해군]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4.6.21